“ 목사님 장인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함께 가요” 라는 전화를 받았다.
잘 살았는지 잘못 살았는지 몰라도 한국에 있을 때 빈소나 장례식에 갈 기회가 없었던 나, 검은 정장 차려입고 교회 사람들과 함께 3시간 차 타고 빈소로 간다. 조문객으로 빈소에 가는 일이 인도네시아에서만 두 번째다.
몇 년 전 옆집 할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빈소에 갔다. 가족들도 옆집 아저씨도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었다. 집에서 너무 많이 울어서 기운이 없는 것인지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나는 눈물이 났다. 옆집 할머니는 내가 처음 인도네시아로 왔을 때 날마다 우리 집에 들르시고 나의 엄마처럼 자상하게 잘해 주셨다. 고구마처럼 찐 바나나와 모과처럼 생긴 과일을 삶아 달콤한 물과 함께 주셨다. 그 맛은 일품이었다. 지나가다가 우리 아이들을 보면 친손자마냥 예뻐하시던 그런 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투명한 유리 관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도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 속에는 나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떠나 온 후 검은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고 옆집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과일을 다시는 먹을 수 없다는 안타까운 생각에 눈물이 났던 것이다.
빈소에서 목사님이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시고 나보고 환한 얼굴로 “감사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고인은 올해 94세 장수를 누리셨고 빈소는 여러 가지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모님은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를 입었고 슬픈 모습은 없었다. 고인은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과 사촌지간이라서 그런지 조문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알루미늄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걷는 노인들과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도 안 울어야지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도 안 주신다니 하며 혼자 달래고 있는데 뭔가 한 방울 떨어졌다. 흘러내리는 콧물 훌쩍거리며 들이마셔야 하나 손수건을 꺼내 씨익 닦아야하나 몰래 우는 자의 고민거리였다. 사람들은 서로 농담도 하고 입구에서 받은 도시락속의 빵을 꺼내 먹기도 했다.
동식물이라도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일부러 우는 것이 아니라 슬퍼서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초상집에는 모두 인도네시아 사람들인데 나 혼자 한국 사람이다. 아무도 울지 않는데 나 혼자 울어서 미안하다. 손수건 꺼내 얼굴을 닦는데 옆 사람이 내 어깨를 건드리며 연못에 노는 잉어를 보고 ‘와.. 저기 잉어가 하마만하다’는 말이 하도 우스워 눈물이 머졌다.
빈소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제일 앞에 백발에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가 계셨다. 모두들 인사를 하는데 그분이 고인의 아내라고 한다. 노부부, 정말 천생연분의 노부부였던 것 같다.
목사님은 할머니에게 이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고 특별히 소개시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더 ‘감사합니다. 라고 한국말로 하셨다. 나는 눈물 자국을 얼른 지워버리고 인도네시아 지방 언어로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시고 할머니께서 웃으셨다. 외국인이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 사용하면 우습듯이 뭐 그런 상황이었는가 보다.
다음 날 새벽 4시에 교회 모여 7시간 버스를 타고 갔다. 관 크기만 한 묘들이 너무 많아 나는 공동묘지인 줄 알았다. 조상대대로 잠들고 있는 문중의 묘들이라 했다. 어떤 묘비에는 우산이 꽂혀 있었다. 그건 높은 관직을 지내신 분의 묘라고 했다.
고인은 장수하셔서 그런지 지금 증손자가 15명이나 되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이 80세 이상을 누리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인데 14년을 더 사셨으니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라고 마이크를 높이 들고 기쁘다고 말했다.
관이 흙속으로 들어가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며 한 줌의 흙을 관위로 쏟았다. 늘 듣고 알던 말이지만 그때처럼 그 말이 그렇게 실감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엄마의 장례를 함께하지 못했다. 아마 엄마도 저렇게 가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고인의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나의 엄마에 대한 눈물이었기 때문에 더 미안했다. 눈물이 흐르는데 마침 비가 온다. 좋은 기회라 여겼다. 비가 오면 눈물을 닦는지 빗물을 닦는지 모를 테니까.
흙을 뿌린 후 유족들과 많은 사람들이 꽃을 뿌렸고 나도 뿌렸다. 일일이 악수를 하는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목사사모님께 속삭였다. "울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