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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김 일상/SNS 취재 활동

봉화 바래미마을

이부김 2017. 10. 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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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바래미마을

                               

멋진 솟을대문으로 들어섰다.

어머, 댓돌위에 고무신 두 켤레가........”

너무 오랜만에 고무신을 보니, 내 안에 쌓였던 감동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말했다. 창호지가 잘 발라진 여닫이문, 적송으로 지어 견고한 툇마루와 시렁위에 즐비하게 놓인 고서들. 소강고택에서 내 조부의 여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늘은 봉화읍 바래미에서 고택체험을 한다. 약 일백십년이나 된 고택마루에 앉자 친정(의성)을 방문한 것 같아 나는 마냥 좋기만 하다.


                                                 ▲ 바래미마을의 한옥


이상하다. 오늘따라 잠이 오질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쉬라고 준, 이 밤에 나는 이리저리 뒤척인다. 자정부터 눈을 감았으나, 세 시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온돌방바닥에 네 명의 여인들과 나란히 누워 이불을 덮었다. 오늘밤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 친정집 언니들과 잠자던 분위기와 사뭇 다를 게 없다. 친정에 왔으니 숙면으로 골아 떨어져야 하는데, 불편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고택의 분위기가 나를 재우지 않고 있다.

 

문풍지 사이로 스며든 달빛에 풀벌레 소리까지 바깥이 몹시 궁금하다. 혹여 마당에 달이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갑자기 월아하고 엄마가 불러 줄 것만 같아 유년시절이 되새김질 되고 있다.

나는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단발머리 찰랑대며 옷소매로 콧물을 쓰윽 닦던 아이였다. 강둑에 파릇파릇한 냉이가 돋아나면 호미로 캐고 다래끼에 담았다. 산비탈에서 미끄럼 타다가 목마르면 손으로 샘물 퍼 마시고, 소나무 송기(松肌)를 벗겼다. 막대기의 단물은 빨아먹고 속껍질은 껌처럼 질겅질겅 씹었다.





초등학교 5학년(1975)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촛불보다 밝아, 숙제할 때 공책에 코를 박고 글씨를 써도 잘 보였다. 텔레비전을 시청 할 수 있어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도시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호강을 누리고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이 산골(고향)을 멀리 떠날수록 출세하는 줄 알고, 대구로 가서 살다가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다.

 

외국생활은 밥을 먹어도 허기진 느낌이고, 가슴에 가득 담긴 고향의 그리움은 고개 숙일 때마다 쏟아지려고 했다. 처음에 매년 고국 방문하다가 육년 후, 뭐 그리 출세할거라고 일 때문에 십년동안 고국에 오지 못했다. 이년 전 고국에 왔으나, 부모님 임종까지 놓쳐버린 나는 산소에서 눈물콧물이 범벅되도록 울었다. 부모님이 안계시자 고향집도 사라졌다. 그리고 올해 5, 나는 외국생활 정리하고 삶의 터전을 한국으로 옮겼다.

 

몇 시나 되었을까?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닭이 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한민국 아침은 독도에서 시작하지만, 봉화의 아침은 닭소리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햇살이 마을에 퍼지기 전 나는 카메라를 메고 고택을 나와 들판으로 갔다.

 

먼동이 트고 밝아지는 마을을 보면서 바래미 이름의 유래를 떠올려 보았다. 마을이 해상보다 낮은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다 밑이라 바래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른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낸 의성 김씨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마을에 우물을 만들고 농토를 개척하며 정착한 이후 의성 김씨들이 모여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 흰고무신을 신었다



소강고택으로 돌아오다가 남호구택(1876) 지붕에 핀 와송(瓦松) 보았다. 아침햇살에 돋아난 와송이 얼마나 예쁘던지, 즐거운 마음으로 사진 찍었다. 때마침 대문을 열던 아주머니와 마주쳤고 인사를 건넸다. 그 다음 집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와 대청마루에 앉았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김뢰식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농사지을 땅을 모조리 저당 잡혀 군자금을 마련하셨다.”는 자랑스러운 일과 김난영의 아들 김뢰식이 남호에 살았고 택호로 남호구택이 되었다는 특별한 이야기까지 후손에게 직접 전해 듣자, 마치 내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는 듯하다.

 

                               ▲ 남호구택 안마당


대청마루에 앉은 아주머니도 찍었다. ‘아이구, 예쁘게 단장하지도 않았는데.......’ 수줍은 미소로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사진을 보내드린다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소개해 줄 곳이 있다며 대문을 나섰다. 사랑채에서 중문이 있는 담을 거쳐 한참을 걸어갔다.

많이 공개되는 않는 곳이라며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곳은 개인서실이자 마을도서관이었던 별채(영구헌)이었다. 집에 돌아와 이메일로 사진을 보냈다. 아주머니는 봉화에 오면 꼭 들리고 우리 좋은 인연을 맺고 추석 잘 보내라 했다. 바래미마을은 특별한 다큐 한편을 만들어주고, 나에게 고향역할까지 톡톡히 해 주었다.

 

언젠가는 내 아들과 딸을 바래미로 데려와야겠다. 그때는 고택체험이 아니라 외가체험이다. 그때도 밤새도록 엄마의 고향추억담을 나눌 수 있도록 지난밤 나처럼 아이들이 잠을 설쳤으면 좋겠다.

 

스마트폰을 잠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요즘, 스몸비(Smombie)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봉화 바래미전통마을에서 하룻밤이라도 지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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