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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김 일상/SNS 취재 활동

추억의 방부제로 만든 떡볶이

이부김 2014. 2. 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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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의 방부제로 만든 떡볶이



오늘은 30년 만에 동창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밴드(BAND)를 통해 한 친구와 연락이 되자 거미줄처럼 줄줄이 여러 친구와 연결이 되었다. 전화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친구의 목소리는 학창시절 그때 그 목소리였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내가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친구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서로 밀린 안부를 묻고 난 후에 학창시절 내 자취방에 모여 떡볶이 만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한참 동안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내친김에 나는 이곳저곳에 수소문을 하여 내가 자취했던 집의 아주머니와도 전화 통화를 했다. 올해 여든 셋이라고 하시는 아주머니께서는 너무도 반가워하시며 아직도 나를 생생하게 기억하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성격까지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성월이……. 너 성격이 완전 말괄량이였는데 ......“ 하시면서 반가워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활동적이고 얌전하지 못한 성격이지만, 한번 인연을 맺고 정이 들면 쉽게 잊지 못하고 또 잊히지 않는 사람인가 싶었다.



  2년 전쯤의 일이다. 오지의 섬에서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 온 그날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러나 보름동안 가정부가 해 준 인도네시아식 밥(반찬)을 먹으며 혼자 학교를 다닌 고등학교 3학년 아들을 생각하니 뭔가 손쉽게 만들 수 있고 그 나이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고3 수험생이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모두 발뒤꿈치를 들고 다닌다는 말까지 있는데 나는 아들이 알아서 잘 해주리라고 믿고(?) 천방지축으로 이국의 오지를 헤매고 다닌 것이다.


  내가 살던 동부 자바 말랑(Malang)에서는 10년 동안 한국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수입마트가 생겨나기 전 이곳에서는 떡을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동차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려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1시간 거리인 수도 자카르타에 가면 떡을 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3년 전에 시내에 수입품을 파는 마트가 생겼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곳에 가면 고추장 된장은 물론 떡도 살 수가 있었다. 누런 색깔의 된장으로 생각하고 사 와서 열어보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까만색 된장이었을 때도 있었다.


  떡을 사러 수입마트로 갔다. 마트 냉동실 제품들 중에 떡을 보니 자카르타에서 몇 군데를 거쳐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얼었다 녹았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는지 떡은 쩍쩍 갈라져 있었고 그 갈라진 틈새에는 성에가 잔뜩 끼어 있었다. 나는 얼음 반 떡 반인 떡 봉지를 들었다 놨다를 여러 번하다가 결국 사기로 했다. 떡볶이가 걸쭉하게 끓고 있을 때 아들이 돌아왔다.
    “ 와! 우리 엄마도 떡볶이 만들 수 있었네. 우리 엄마 멋있다!”
    “ 그럼, 당연하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맛있게 잘 만들어”

    “ 아! 그렇구나, 나는 엄마가 떡볶이 만들어 준 적이 없어 못 만드는 줄 알았지.”
  그러고 보니 인도네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아들이 4살이었다. 그때부터 떡볶이를 만들어 준적이 없었으니 아들은 엄마가 떡볶이를 요리할 줄 몰라서 안 만들어 준다고 생각할 만도 하겠다.
    “ 한솔아! 엄마가 바쁘고 재료가 없어서 못 만들지 떡볶이 같은 음식은 눈감고도 만들수 있어!”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고등학교 때 떡볶이 만들었던 일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인도네시아 고등학생들

    여고생 때의 일이다. 나의 친구들은 집이 읍내거나 아니면 가까운 거리에 살아 버스로 통학하였지만 나는 집이 원거리 산골이라 자취를 했다.
그날은 일찍 수업을 마쳤고 여섯 명이 나의 자취집에서 떡볶이를 해 먹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귀찮아 밥을 잘 해먹지 않았지만 부엌에 소금과 설탕, 조미료는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돈을 조금씩 거출하여 떡과 어묵을 사고, 고추장은 영희가 자기 집에서 가지고 왔다.



  나는 떡볶이를 만들 커다란 냄비를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빌려왔다. 떡볶이는 얌전한 은주와 정희, 은경이가 만들고 덜렁대고 말괄량이인 영희와 나 다른 친구들은 구경하기로 했다. 떡과 고추장을 넣고 물을 부어 어느 정도 끓었다며 설탕을 달라기에 나는 하얀 설탕 통을 꺼내 주었다. 설탕을 한 숟갈 떠 넣고 젓다가 맛을 보더니 아직 달지 않다며 설탕을 반 숟갈을 더 넣었다. 맏이고 믿음이 신실한 은주는 정성을 다해 진정으로 떡볶이를 젓고 또 저었다. 맛있는 떡볶이가 끓고 있는 동안 방안에는 여고생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많은 수다로 참새 떼처럼 조잘거렸을까.
 

은경이는 또 숟가락에 떡볶이 국물을 떠서 맛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아직 단맛이 아니라고 말하자, 방안에서 한 친구가 방금 설탕을 넣었으니 아직 덜 녹아서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또 까르르 웃고 떠들었다. 그러는 동안 은주가 떡볶이 국물을 떠 먹어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성월아 떡볶이가 너무 짠 맛인데......”
  내가 맛을 보니 정말로 짠 맛이었다. 은경이도 정희도 영희도 맛을 보더니 이구동성으로 모두 짜다고 했다. 그때 정희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고추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했다. 나도 은경이도 은주도 그런 것 같다고 조용히 이야기 했는데 고추장을 가지고 온 영희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힐끗 쳐다봤다.


  나는 그러면 설탕을 더 많이 넣자 하면서 설탕을 한 숟갈 푹 떠서 떡볶이 위에 뿌리고 수증기 때문에 숟가락에 남을 설탕을 찍어 먹다가....... 이제까지 설탕이라 생각하고 넣은 것이 소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새로 나온 한주소금은 설탕처럼 부드러운 입자였다. 설탕하고 소금을 사다 놓기만 했지 요리를 하지 않았으니 어떤 게 설탕이고 소금인지 구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지 이 많은 떡과 어묵을----.
    “얘들아 미안하다. 이거 설탕이 아니고 소금이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말하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통에 든 소금을 찍어 먹었다. 그때 옆에 있던 영희도 찍어 먹더니
    “야 너희들 아까 뭐라 캤노, 소금을 계속 넣어 놓고 우리 고추장은 왜 들먹거리는데.”
  그 말에 우리들은 모주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이 그리도 우리들을 웃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 그때 우리들의 젊음이 우리들을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았다. 이 많은 떡볶이를 버리자니 정말 아까웠다. 한 친구가 그러면 우리 떡볶이를 물에 씻어서 먹어보자는 기발한 제의를 했다. 우리는 그 좋은 아이디어에 박수를 치며 냄비를 들고 우르르 마당에 있는 우물로 갔다. 한 친구는 떡볶이 국물을 쏟아 붓고 한 친구는 우물의 두레박으로 찬물을 퍼 올려 냄비에 부었다. 그랬더니 빨간 떡볶이가 
하얀 떡볶이가 되어 퉁퉁 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자취집 아주머니가 참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으셨다. 우리
  금쪽 같은 용돈으로 정성 들어 만든 한 냄비의 떡볶이를 하나도  먹어보지 못하고 버려야만 했다.

  가만히 되짚어보면, 그날 우리는 떡볶이에 짠 소금을 퍼 넣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추억의 방부제를 잔뜩    퍼 넣은 것 같다. 그렇기에 복잡한 사고와 바쁜 일상 속에서도 30년이란 세월을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 않는가. 그때도 우리들은 많이 웃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터져 나와 실컷 웃게 만들어 준다. 떡볶이가 고등학생들에게 영원히 사랑받듯이 우리들도 떡볶이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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