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공중전화
자카르타시내 내가 사는 라반데(Lavande)아파트는 사힏대학교(University Sahid) 정문과 나란히 붙어 있다. 대학교 정문 앞 인도에는 수동식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 횡단보도를 이용하고 싶으면 신호등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누른다. 버튼을 누르면 횡단보도에는 초록불이 켜지고 도로에는 빨간불이 켜져 자동차들이 멈춰 서게 돼 있다. 수동식 신호등은 손을 들고 건너는 것보다는 보행자의 안전을 더 확실하게 지켜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고 편리해서 좋다.
그 편리한 신호등 옆에는 공중전화박스가 설치되어 있다. 요즘은 공중전화기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가끔 보이긴 해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고장 난 걸 그냥 방치해 둔 것이고 온전하게 걸 수 있는 공중전화기는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교 정문이라서 학생들로 붐빌 때가 많다. 그러나 혼자 말없이 매달려 있는 공중전화기를 보면 왠지 심심해 보인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한때는 그 공중전화기를 사용하겠다던 대학생이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을 텐데.
이제는 편리한 핸드폰 때문에 쓸쓸하게 전화박스만 지키고 있는 공중전화기. 내가 전화를 걸어 주고 싶을 때가 너무 많지만 고장난 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인도네시아에 도로변에 있는 공중전화기들은 시내 통화만 사용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장거리나 국제전화와 핸드폰으로 걸어야 할 경우에는 와르텔(Wartel)이란 곳으로 가야 전화를 걸 수 있다.
Wartel(와르텔)이란 말은 Warung Telekomunikasi에서 가져 온 약자인데 시스템은 개인이 운영하는 간이 전화국이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와르텔은 운영하는 건 아주 쉽다. 통신사에 제출할 허가서를 작성하고 여러 대 전화기를 박스 안에 설치해 두고 간판을 달아 놓으면 된다. 주로 PC방이나 학교 앞 빌딩이나 가게 사람들이 붐빌만한 곳에 많이 있다.
나는 PC방을 운영하면서 와르텔을 해 본적 있다. 와르텔 전화번호로 나오는 요금은 일반 전화요금보다 더 싸다.
와르텔은 시스템에 맞게 프로그램이 따로 있다. 기본 통화요금이 정해져 있으며 다만 주인의 노하우에 따라 통화시간을 단축시키고 통화요금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시스템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기본통화가 3분에 500 루피아라 가정하고 기본통화시간을 2분 30초로 정하고 그 다음 1분마다 요금이 올라가면 단축하여 45초로 정하면 된다. 통화시간을 단축한다고 위법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전화요금이 비싸면 손님들이 줄어들 수가 있다.
내가 처음으로 공중전화를 보고 걸었던 경험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일이다. 면소재지에서 초, 중등학교 다니던 나는 방학이 되어 대구에 사는 언니네 집으로 놀러갔다.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에서 언니에게 마중 나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한 달 전 친정 왔을 때 언니가 일러준 방법대로 수화기를 들고 10원짜리 동전을 두 개 넣고 종이에 적힌 번호를 하나하나씩 손가락으로 돌렸다. 뚜, 하는 소리가 두 번 나더니 철컥하면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서 수화기를 놓았다.
이번에는 잘해봐야지 하면서 다시 걸었는데 아까처럼 뚜, 하는 소리가 나더니 동전이 철컥하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구 또 잘못 되었는가 보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더니 손에 든 동전을 다 써버렸다. 다시 동전을 바꿔서 걸었다. 이번에도 철컥하면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수화기를 놓으려고 하는데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싶어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나 언니목소리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작은 라디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게 너무 신기했는데, 공중전화기 속에서 언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게 나는 너무 신기했다.
요즘도 가끔 공중전화를 보면 그때 일이 떠오르곤 한다. 사람들은 전화통화하다가 화가 나면 전화기를 부셔지도록 화풀이 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러나 길거리에 무뚝뚝하게 서 있는 공중전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으로 전달해주고 그리움도 키워주는 감정의 박스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파트 앞을 지날 때마다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고 고장 난 공중전화지만 자꾸만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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