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사랑스런 자녀가 9명
3년 전, 나는 그 산꼭대기에 촬영하러 갔었다.
한낮에 적도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산꼭대기에서 땀 흘리며 뛰어다닌다는 건 물 담은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체력이 소비되고, 군살퇴치와 몸매를 유지해 주는 운동 같은 일이기도 했다.
나는 목이 무척 말랐다. 물을 마실까 해서 길가의 가게를 찾았다.
가게는 다 허물어져가는 볏짚창고 같았지만 그 안에 생수병이 있었다. 반가웠다. 생수를 마시고 나오는데 한 꼬마를 만났다.
꼬마는 이마에 떨어지는 뜨거운 햇살을 어쩌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며 먼지가 풀풀 날아다니는 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
시골의 꼬마들만 보면 이상하게 나는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괜히 동류의식을 느끼고 관심이 간다.
그때도 내 팔목에 끼여 있던 액세서리 팔찌를 빼 여자꼬마 팔목에 끼워 주었다.
꼬마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깨에 막대기를 멘 남자가 다가왔다.
막대기 양쪽 끝에 매달린 통에서 검은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꼬마의 아빠였다. 어떤 여자가 자신의 딸과 이야기를 나누자 궁금해서 와 본 것이었다.
꼬마의 아빠는 젊었다. 자신의 딸이 팔찌 선물 받은 걸 보고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꼬마는 네 번째이고 집에 세 명의 동생이 더 있다고 가족이야기를 했다.
그날 촬영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그 꼬마도 잊혀졌다.
얼마 전 그곳에 또 촬영하러 갔었다. 아기를 앉고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안다고 말했다.
어떻게 나를 아는지 묻자, 예전에 꼬마에게 팔찌를 주었고 자신은 꼬마의 엄마이며 품에 안긴 아기는
꼬마의 동생인데 아홉 번째 아이라고 3년 전 아빠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침묵하자 혹시 못 믿겠으면 집에 가서 아이들을 세어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일어나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집안으로 가는데 집모양만 봐도 한눈에 가난함이 짙게 베여 있었다.
그곳은 사방이 원유 채취하는 현장이다.
그런 곳에 집이라고 턱하니 있으니 척 봐도 가난함이 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마당에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 팔뚝에는 피부병처럼 상처가 나 있었다.
연고 하나를 팔 한쪽에 다 발라도 모자랄 만큼 흉터가 많이 나 있었다. 게다가 일곱 번째 아이는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져
피가 났고 여덟 번째 녀석은 종아리가 오토바이 연통에 데었다며 진물이 고여 있었고 파리들이 날아와 진물을 빨아먹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아이들 이름보다 번호를 부르는 것이 더 쉬웠다. 아이들 스스로도 자기는 몇 번이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들 식사시간이 되었다. 밥과 반찬은 라면뿐이었다.
그 라면도 서로 제몫을 안 놓치려고 아우성쳤다. 땅바닥에서 앉아 밥을 먹자 닭들이 달려와 아이들 밥그릇의 라면을 콕 집어 달아나려다가
아빠에게 붙잡혀 라면사리를 빼앗겼다. 라면을 물고 가다 빼앗긴 닭들이 불쌍했고 닭에게 뺏은 라면사리를 밥그릇에
담아주자 좋다고 먹는 아이들도 가엾게 느껴졌다. 그 많은 아이들 중 나는 유독 일곱 번째 딸아이가 예뻤다.
애교도 잘 부리고 미소도 잘 짓고 노래도 잘 불렀다. 꼬마의 엄마는 피임하는 게 두려워 아이를 이렇게 많이 낳았다며
이제는 그만 낳을 계획이라고 했다. 돈 없다고 부부가 갈등을 느낀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말은 진리가 아닌 것 같다.
꼬마의 아빠는 20살 엄마는 16살에 결혼하여 12년 동안 딸 6명 쌍둥이 포함 아들 3명 모두 9명 자녀를 두게 되었다.
허름한 판잣집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아이들치곤 해맑은 웃음과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하게 빛났고 예뻤다.
그곳의 사람들은 원유우물을 가지고 있으며 원유판매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꼬마의 아빠는 타지에서 왔기에 남들이 정제한 후 흘러버리는 폐수를 계곡에 막아두고 둥둥 떠다니는 기름을 걷어
물과 원유를 분리 작업하여 원유 정제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한다. 추수 후 들판에서 이삭줍기 같은 일이다.
아빠의 그 수입으로는 열 한명의 생활에 많이 쪼들린다. 다산가정이라고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특별히 받는 건 없다.
가난하여 받는 보조금은 한 달에 쌀 20kg도 아니고 고작 쌀 2kg이라고 한다.
그곳을 촬영하던 마지막 날 나는 계란 한판과 과자와 학용품을 사가지고 갔다.
학용품은 예전에 팔찌 주었던 그 꼬마에게 주었다. 나도 어릴 때 멋진 학용품을 받으면 친구들에게 자랑했으니
꼬마도 내일 학교에 가서 자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아끼고 가방에 달고 다녔던 곰 인형은 일곱 번째 꼬마에게 주었다.
그 집을 나오면서 나는 몇 가지를 선심 쓰듯 전해주고 오랫동안 그들에게 잊히지 않는 사람으로 그들 마음속에 임대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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