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조선문학/수필
나다. 잘 있냐?
최원현
“나다. 잘 있냐? 아그들도 다 잘 있고?”
이모님의 전화는 늘 이렇게 시작한다. “네, 잘 있어요. 이모님도 건강 하시지요? 제가 먼저 전화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하면 “뭔 소리다냐, 느그들언 벌어먹고 사느라 바쁜디 할 일없는 내가 전화를 해야지야.” 하신다.
나는 아주 어려서 어머니를 여윈 덕에 외할머니가 어머니셨고 이모님이 어머니셨다. 그러나 지금은 외할머니도 가신 지 오래 되었고 이모님만 계시다. 그런데 아무리 교통이 좋아졌다고 해도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쉬 다녀올 수 있는 길이 아니고 또 뭐가 그리도 바쁜지 좀처럼 시간을 만들 수가 없다. 그래도 전화가 있으니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고 직접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 얼마나 편리하고 고마운 세상인가.
그래도 나는 육필 편지 쓰기를 권장하고 있다.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만 편지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로 소식을 받는 맛 또한 소리로 듣는 것 이상의 또 다른 맛과 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로부터 책을 증정 받으면 가급적 손쉬운 전화로 축하와 감사의 뜻을 전하기보단 편지를 써서 보낸다. 내 마음과 생각을 오래도록 남길 수 있고 받아보면서 얻는 기쁨이나 행복은 요즘처럼 편지쓰기가 줄어든 세상에선 신기할 만큼 반갑다. 그렇지만 요즘 통신의 꽃은 아무래도 전화일 것 같다. 지금은 가히 전화의 시대다.
내 집에도 그러고 보니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게 한 둘이 아닌 것 같다. 우선 집 전화에 아내와 나의 핸드폰이 있고, 컴퓨터만 켜면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보낼 수 있는 이메일이 있다. 뿐인가. 우리 가족들의 공동 공간인 카페가 있어서 들어만 가면 친지들의 소식까지 금방 알 수 있다. 사진도 올리고 글도 올리고 노래도 올린다. 뿐인가, 내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며 블로그, 카페도 여럿이다. 그곳에서도 즉시 쪽지편지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도 전할 소식은 여전히 많고 하지 못한 말도 많은 것을 보면 말의 홍수 시대다. 이러니 통신이 발달치 않을 수 없으렷다.
요즘 내겐 엄청난 변화 아니 발전이 왔다. 거의 기계치에 가까울 내게 이같은 변화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내게서 문학을 공부하는 할머니 학생이 손주라며 핸드폰을 켰다. 헌데 폴더를 열자 이내 동영상으로 아이의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 동영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나요?” 하고 놀라워했더니 “아유, 선생님은 손주까지 있으시면서 아직 이런 것도 할 줄 모르세요?” 하는 게 아닌가. 내가 볼 때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학생이긴 해도 나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분인데 그것도 못 하느냐고 하니 참 기가 차다. 이왕 내친 것, “그래, 어떻게 합니까?” 하고 내가 다그치자 “선생님, 아주 쉽습니다. 동영상으로 촬영을 한 후 앨범에 들어가서 바탕화면으로 저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한다.
나는 바삐 집으로 향했다. 딸아이에게 전화를 거니 마침 집에 있는데 거기에 제 어미까지 집에 와 있다니 옳거니 나도 핑계 낌에 딸네로 가면 되겠구나.
이제 갓 돌이 지난 손녀는 나를 아주 좋아한다. 벌써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란 걸 알아본 듯 식구들 중에서도 나를 보면 제일 활짝 웃는다. 하기야 이보다 훨씬 전부터 아기는 할아버지와 눈 맞추기 게임을 즐겼다. 눈이 맞으면 까르르 웃는 것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녀석과 자주 눈 맞추기를 했더니 녀석도 할아버지와 그러는 것이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닌가보다.
여하튼 나는 말없이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 손녀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옆에서 제 할미는 오자마자 아기한테 뭐하느냐고 야단이지만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런데 요놈이 좀처럼 가만있질 않는다. 할아버지를 반기느라 안기려들고 고개를 마빡이처럼 흔들며 좋아라 한다. 그러니 사진을 찍어보면 이마만 나오고 얼굴이 간데없다. 그렇게 몇 번을 했나. 겨우 촬영을 마치고 배워온 대로 앨범에서 바탕화면으로 저장을 했다. 그리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순간 까르르 소리를 내며 녀석이 마구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나타난다. ‘야, 된다.’ 나는 음흉스러울(?) 만큼 의미 담긴 미소를 짓고는 아내의 눈앞에다 대고 폴더를 열었다. 순간 아내의 눈이 조금은 커진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뭐에요? 마빡이 같이 이마만 나오고, 찍으려면 잘이나 찍지.’ 냅다 소리를 지른다.
하긴 그렇다. 몇 번을 시도해 겨우 얻은 것이지만 녀석이 좀 까불어야지 가만 있지를 않으니 내가 봐도 이마만 돋보인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잘 찍힌 것 같고 오히려 더 귀여운 것 같다. 아내가 슬그머니 내 핸드폰을 뺏어간다. 그리고는 폴더를 연다.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번진다. 아기 눈앞에서 핸드폰을 다시 연다. 아기가 그걸 보더니 같이 까르르 웃는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발전이다. 사실 아기와 제 어미와 할머니 3대의 사진을 바탕화면에 담은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동영상 바탕화면이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참으로 세상이 빠르게 많이도 변한 것 같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엔 전화기가 딱 한 대 있었다. 그것도 체신부에서 설치해 준 것이었는데 핸들을 마구 돌리다 수화기를 들고 저쪽에서 응답이 오면 통화가 되고 아무 응답이 없으면 또 마구 돌리다 신호를 확인하는 그런 수동 기계식 전화기다. 객지에 가있는 자식들이나 친지로부터 연락이 오면 그 전화를 받기 위해 그 집까지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달리기를 해야 했다.
고등학생 때였던가. 친구가 경북 영주엘 갔었다. 그때도 전화가 많지 않을 때였다. 갑자기 마을 스피커에서 ‘oo 엄마 전화 받아요!’ 하는 게 아닌가. 이장님네 집에서 방송한 거란다. 전화가 오면 방송을 하여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객지에 나간 자녀나 가족들에게 이장네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풍경일 것 같고 흐뭇한 나눔의 방법이지 않은가. 나도 시골구석에서 서울로 나오게 되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화였다. 집 전화가 많지 않을 때라 전화를 걸어보고 싶어도 걸 곳이 없을 상황인데 그래도 시골에서 상경할 때 급할 때 연락 하라고 적어온 전화번호가 몇 있어서 십 원짜리 동전을 넉넉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전화기만 보이면 어디로건 한 통화씩 전화를 하기도 했었다.
내가 처음으로 집에 전화를 놓게 되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사방에 전화번호를 알려주던 생각이 난다. 흑색 전화기도 놓기가 쉽지 않던 때라 몇 년씩 순서를 기다렸는데 그 때 바로 설치가 되었던 백색전화기 한 대 값이 기백만 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전화는 그 당시 대단한 재산이었다. 지금이야 주머니마다 전화가 있으니 어찌 보면 전화는 가장 흔한 생활용품이라 하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젠 가히 내 분신처럼 되어버리지 않았나싶다. 어쩌다 전화기를 놓고 나간 날은 내내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다. 귀에서는 계속 전화 오는 신호음이 들리고 누군가 나와 통화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까지 했다.
언젠가 내가 아는 분이 산엘 갔다 길을 잃었는데 전혀 연락할 길은 없고 어찌나 혼이 났던지 내려오는 길로 핸드폰부터 구입했다 한다. 사업을 하는 분인데도 그런 기계를 쓰는 것엔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그에게 핸드폰이 생명줄이라며 지금은 애찬론자가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한 지인은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데 그날따라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았단다. 헌데 하필 그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더니 다리가 맥없이 풀리고 주저앉게 되었는데 꼼짝을 할 수 없더란다. 집은 백 미터도 안 되는데 하필 구부러진 길이라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촉촉이 내린 차가운 이슬에 온 몸은 점점 차가워져 이러다간 죽겠구나 싶더란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조금씩 움직여 두시간만에 소리가 들릴 만큼 한 거리까지 와 소리를 질렀더니 집에서도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다가 소리를 듣고 나와 병원으로 급히 옮겼더란다. 그 분은 그 때 핸드폰만 갖고 갔으면 연락을 곧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하마터면 큰 일 날 번 했다며 사람에게 무슨 일이 언제 어느 때 생길지 모르니 항상 휴대폰을 갖고 다니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20년 넘은 아파트에 살면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핸드폰이 있는가 꼭 주머니를 확인하곤 했던 것 같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핸드폰으로 인해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기도 하니 오늘이란 시대는 통신의 혜택을 최대로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싶다.
지금 내 핸드폰에 담고 있는 손녀의 어미 그러니까 남미 파라과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딸아이와 네이트온(nate on)으로 화상통화를 하면서는 또 얼마나 과학문명의 혜택 특히 통신의 발달에 감사했는지 모른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도 고마운데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이 기적 같은 사실 앞에서 지구촌 가족이란 말을 더욱 실감했었다. 그 딸아이는 귀국하여 이제 나와 함께 있지만 아들 내외는 지금 미국에 있다. 전화는 자주 하지만 그래도 얼굴이 보고파지면 역시 화상통화를 한다. 요즘은 며늘아기의 배가 너무 부른 것 같아서 한 달여 남은 산달까지 갈까 염려도 되는데 그 불룩 나온 배를 며늘아기와 아들 녀석은 자랑스럽게 화상으로 보여준다.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통신시대를 만끽하며 사는 우리가 아닌가.
이모님의 전화는 나를 참 편안케 한다. 어른들이 잘 계신다는 소식만큼 반갑고 든든한 소식이 어디 있으랴. 어렸을 때 부모님을 모두 여읜 나는 팔순이 넘으신 장인 장모님의 안위가 늘 걱정이 된다. 이모님 댁보단 가까워 비교적 자주 가 뵙는 편이지만 옆에 함께 게시지 않으니 걱정이 아니 될 수 없다.
‘잘 계시지요?’ 전화를 드리면 들려오는 목소리로 그분들의 상태를 감지한다. 아마 아이들도 내게 그러리라. 그래 낯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에서 살려니 얼마나 바쁘고 힘들고 외롭겠나. 나도 이모님처럼 ‘나다. 잘 있냐?’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자주 내 안부를 전하고 장인 장모님께도 더 자주 ‘잘 계시지요?’ 하면서 내 잘 있음을 확인시켜 드려야겠다. 참 그러고 보면 우린 정말로 좋은 세상에 사는 것 같다. 소리(전화)와 화면(화상)으로 글(이메일)로 나누는 따뜻한 마음과 믿음과 사랑, 이런 세상, 이런 시대 이런 나라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금 당장 미국의 아들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해야겠다. ‘나다. 잘 있냐?’ 그러면 분명 아이들은 내가 이모님께 그랬던 것처럼 ‘자주 전화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하면서도 내 목소리를 들으며 고국의 부모님은 잘 계시는구나 하고 마음을 놓을 것이다. 내친 김에 장인 장모님께도 전화를 드려야겠다. ‘잘 게시지요?’ 그러면 아마 장모님이면 ‘밥들 먹었어?’ 하실 게고, 장인어른이시면 ‘우리야 잘 있지. 너들도 잘 지내는겨? 애들도 잘 있고?’ 하실 게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래도 이젠 소리만으론 마음이 안 놓인다. 아무래도 아내와 상의하여 장인장모님께도 화상통화가 되는 전화기로 바꿔드려야 하겠다. 그래야 목소리로만이 아닌 모습으로도 잘 계시는지 상태를 더 정확히 알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노인들이란 조석 건강도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모님 전화를 받은 것도 한참 된 것 같다. 오늘은 이모님께도 내가 먼저 전화를 드려야겠다. 그래도 ‘잘 있냐? 아그들도 다 잘 있고?’ 이모님과의 통화 내용은 변함없으리라.
전화기가 빨리 하지 뭐예요 하며 나를 재촉하는 것 같다. 전화기를 드는 내 손보다 가슴이 먼저 기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최원현 http://essaykorea,net
수필가. 칼럼니스트. 국제펜클럽 심의위원.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크리스천문협 수필분과회장, 한국수필가협회·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한국수필․수필세계․우리문화․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 동포문학상 대상.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숨어있는 향기> <서서 흐르는 강> 등 1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