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기
최원현
우리 집엔 25년이 넘은 장난감 두 개가 두 번째의 주인을 맞아 놀고 있다. 하나는 오똑한 빨간 코에 까만 눈 그리고 커다란 빨간 귀에 목에는 땡땡이 빨간 나비넥타이를 한 뚱뚱이 오뚝이이고, 하나는 나무를 깎아 만든 네 바퀴의 목각 자동차이다.
둘 다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원래는 지금 미국에 가있는, 얼마 전 딸을 낳아 이젠 아빠가 된 아들아이의 장난감이었다. 오뚝이는 제 이모들 중 누군가가 돌 무렵쯤 사다 준 것 같고, 자동차는 제 큰 아빠가 다섯 살 때쯤 독일에서 사다 준 것이다.
워낙 아이는 차를 좋아하여 겨우 말을 배울 쯤부터 제가 좋아하는 차만 지나가도 마구 소리를 지르곤 했다. 다섯 살 쯤 되자 차종을 거의 완벽하게 구별했는데 자동차 회사 부사장이던 제 큰 아빠가 그걸 보고 차 좋아하는 조카를 위해 사다 준 선물이었다.
사실 집에는 크고 작은 장난감 차들이 많았는데 아이는 유독 이 나무 차를 좋아했다. 그러니 목각 차는 25년은 되었고, 오뚝이는 28년쯤 된 것 같다.
차는 아들아이가 커서도 제 방 책상 위에 다른 차들과 함께 올려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뚝이는 재건축으로 지난 해 이사를 하는데 안 쓰는 물건들 속에 섞여있던 것을 꺼내 놓았었다. 헌데 그것을 이렇게 조카 곧 제 누이의 딸이 갖고 놀게 된 것이다.
사랑은 서로를 어루만지며 자라고 변한다고 한다. 아이가 갖고 놀던 이 두 개의 장난감 또한 아들아이가 어루만지며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이날에 이른 것이니 예사 물건이랄 수 없다. 그걸 제 조카가 갖고 놀고 있으니 아이의 사랑도 내리사랑으로 전해질 법 하다.
너무 어루만져서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목각 자동차는 세월의 연륜 만큼이나 정스런 물건이다. 전혀 유행을 타지 않는 오뚝이 인형 또한 별 흠집도 없이 어린 날을 기억케 한다. 사랑은 손끝에서 나와 그가 만지는 만큼 사랑을 묻혀주고 그렇게 닫혔던 마음도 열고 속 깊이 스며있던 묵은 상처도 녹여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그냥 바라보지를 못한다. 아무데서나 그저 만지고 껴안는다. 우리 세대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었다. 그런데 아들아이가 갖고 놀던 두 개의 장난감을 손녀에게 넘겨주니 아기는 그걸 만지고 가슴에 품고 입으로 뽀뽀를 한다. 삼십 여년의 세월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 사랑 나누기를 하고 있다. 그걸 본 아내가 합세하니 여인 삼대가 장난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월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 추억을 나눈다.
삶은 보듬기이고 사랑은 나누기란다. 아니다. 삶도 나누기고 사랑도 보듬기다. 그런데 나는 보듬기도 나누기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으니 사람도 사랑도 점수 미달인 셈이다. 지금에도 여전히 보듬기도 서툴고 나누기도 서툰 것을 보면 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걸 새로 배우기라도 하랴.
요즘 젊은이들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보듬기도 어루만지기도 잘만 하는데 나는 지금에야 한 번 해보자 하고 아내에게 시도를 했더니 그게 어찌나 어색하고 낯간지럽던지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만다. 우리 세대란 그렇게 바라볼 뿐이어야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기가 오뚝이를 갖고 노느라 한 쪽에 밀쳐진 목각 차를 손에 쥐니 옛날 아들 녀석의 어릴 적 모습이 그냥 눈에 선해진다. 세월이 어느새 이리 많이 흘러버렸나. 조금 전에 화상통화로 미국의 손녀까지도 본 터이지만 목각 차를 손에 들고 보니 아기도 아기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또 보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이어서일까. 나도 몰래 언제부터인지 목각 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반질반질한 촉감이 아들아이의 어릴 적 보드라운 살을 만지던 것처럼 기분 좋게 느껴진다.
삶도 어루만지기로 살고 사랑도 어루만지기로 할 일이다. 그걸 이제야 깨닫나보다.
최원현 www.essay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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