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여행은 일이고 일은 여행이다

좋은 글 모집/늘샘최원현수필

외롭지 않은 삶

이부김 2009. 10. 26.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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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삶

- 내가 꿈꾸는 세상 -


최원현


요즘 들어 시골에 가 살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듣는다. 전 같으면 ‘그렇다.’ 라고 쉽게 대답을 할 텐데 요사이 자꾸 생각이 바뀌는 것 같다. 아내도 시골로 내려가 살자고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나는 왠지 자신이 없다. 우선 시골에 가도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며칠 전에도 시골엘 다녀왔다. 과일 나무 몇 그루를 베어낸 자리에 고구마 몇 두렁을 심었는데 내려간 김에 그걸 좀 캐오기로 했다. 헌데 황토인데다 얼마나 고구마들이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 삽을 깊숙이 박고 파내어도 온전하게 캐내지지 않고 꼭 끝이 잘리고 만다. 그렇게 겨우 한 두렁을 캤는데 심는 일도 어렵지만 거두는 일 또한 이리 힘드니 나는 농사짓는 체질은 못 되는 것 같다.


아내는 농사일은 자기가 하겠다지만 그게 어디 될 법한 말인가. 내 성미에 일은 잘 못한다 해도 보고만 있지는 못할 것이고 막상 나서면 쉬엄쉬엄도 못하는 성격이니 하루 일을 하고나면 며칠은 앓아눕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일은 시골에서의 외로움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해만 지면 사방이 어둠에 갇히고 적막과 고요가 천지를 덮는 시골의 밤은 처음 며칠은 좋을지 몰라도 금방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사람은 참 변덕스런 존재인 것 같다. 나 또한 젊은 날엔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꿈도 꾸었다. 그 꿈이 아주 사그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용기도 막상 당면하니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것이다.


큰 서까래를 삼각으로 하늘 높이 올린 고깔모자형 집을 짓고 싶었다. 벽은 황토벽돌로 하고 안에는 칸막이를 하지 않아 그냥 훤하게 터진 곳에 큰 앉은뱅이책상을 하나 놓고 책도 책장 없이 빙 둘러가며 쌓아놓고 싶었다. 자연 채광이 되도록 지붕을 뚫어 하늘이 보이게 하고 침대 대신에 평상을 놓고 바닥은 황토온돌에 볏짚을 깔고 그 위에 왕골 돗자리를 깔아 폭신한 바닥이 되게 하고 싶었다. 계절 따라 쑥이며 꽃을 따다 말려 돗자리 밑에 깔아 은은하게 자연의 향기가 스며나게 하고, 한쪽엔 사시사철 차를 끓여먹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차향이 감돌게 하고 싶었다. 때로는 장난삼아 다듬이질도 해 보게 다듬잇돌과 방망이도 마련해 놓고 화로도 하나 놓아 겨울이면 화롯불에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먹는 맛도 보고 싶었다. 슬리퍼 대신 짚신을 신고 창문엔 창호지를 넓게 발라 문풍지 떠는 소리도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젊은 날의 꿈이 나이가 들면서 바뀌어버렸다. 이유는 딱 하나 외로움을 감내할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갑자기 외로울 거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 건지. 아내가 있고, 가끔씩 찾아주는 이도 있을 테고, 풀벌레며 바람소리에 댓잎 사운대는 소리 등 벗할 것도 많을 텐데 왜 외로울 거라 지레 겁부터 먹는지 모르겠다.


헌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단순한 외로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지금의 인연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의 작용이었다. 하고 있는 일들, 늘 만나고 가까이 하던 사람들, 바쁘다 바뻐 하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뛰어다니던 것들을 접어버리고 한가로울 만큼 여유로워졌을 때의 나를 지탱해 줄 그 무언가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아서였다.


원래 나는 참 소심한 편이다. 아이들에게 한 번 야단을 치고 나면 삼일은 힘겨워 했다. 누구와 다투기라도 하면 풀어버리기까지 견디질 못한다. 그런 소심증의 사람이라 자꾸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추스르고 건사하며 비로소 내 향기를 내는 삶을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누르고 평안한 내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리는 일이다. 닫아걸던 문고리부터 없애는 일이다. 나를 강하게 의식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 속에 있는 나, 아주 자연스레 그들 속의 나, 그들의 한 부분인 내가 되는 일이다. 그들의 삶을 내가 먼저 거들며 그들 속에 내가 있게 하는 일이다.

 

 


 

이만큼의 삶 동안 받은 사랑의 빚들을 조금씩이라도 갚아가고 싶다. 그렇게 또 다른 바쁜 삶으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베푸는 삶의 한편에서 세상을 돌리는 작은 톱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꿈꾸는 세상은 나로 인해 아주 작게라도 감사의 마음이 돌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평화이고 네가 나에게 감사가 되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세상, 그런 세상을 나로부터 시작하여 그런 세상에 살고 싶음이다. 그러면 어찌 외로움이 느껴지랴. 시골과 도시, 사람의 많고 적음이 어찌 외로움이 되랴. 나는 항상 어디서든 한 부분이고 그래서 나는 나 자체로 인정되기 보단 늘 ‘모두’나 ‘우리’ 속의 지체로 있고자 함이다.


같은 하늘, 같은 땅에서 같이 숨 쉬고 사는 이 평화와 행복은 그런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세상,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


  0910대한문학/내가꿈꾸는세상/2009.10.05/13매


최원현 www.essaykorea.net
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문학평론가.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외,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한국수필작가회장

역임. 수필세계·좋은문학·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창작문예원 대표.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 등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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