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여행은 일이고 일은 여행이다

좋은 글 모집/늘샘최원현수필

계절앓이

이부김 2009. 10. 13.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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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앓이  



                        최원현/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http://essaykorea.net

 

 나만 겪는 일일까. 근래 들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앓곤 한다. 온 몸에서 기운이 모두 빠져버린 것 같고, 열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다. 무엇을 할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깊이 잠이라도 들고 싶은데 귀와 눈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져 잠 속으로도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자연 신경질적이 되고 극도의 피로감에 젖어 병든 닭처럼 풀이 죽게 된다.


  충분히 쉬어라도 보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른해진 심신은 깊은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흐늘흐늘 녹아내린 채 마음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다. 누구는 갱년기 증상이라고 하지만 그도 아닌 것 같다. 자꾸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 같고 알레르기가 생기는, 기계로 말하자면 중간 중간 관리를 좀 잘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반백년을 넘게 쉴 사이 없이 써먹기만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예로부터 아홉수를 조심하라던 어른들 말씀이 생각난다. 곰곰이 새겨보면 그 말씀에 일리가 있다. 사람의 신체 바이오리듬도 10년 주기로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그 바뀌는 순간의 때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장 문제가 많이 생긴단다. 세상 모든 것엔 매듭이 있고 단락이 있기 마련이다. 하루라는 단락, 일주일, 열흘, 한 달, 한 계절, 1년 등 세월만 해도 그 매듭과 단락이 넘어가고 연결되어지는 순간에서 조심해야 한다. 이음새는 자칫 잘못하면 보기 흉하게 될 수 있듯이 시간과 시간 사이 또한 자연 순리의 일부로 단락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젊었을 때는 회복이 빨라 느끼질 못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고 기력이 떨어지니 그 연결과 적응과 회복력이 약해진 때문이리라. 목욕탕에서 온탕과 냉탕을 마구 옮겨 다니는 사람을 본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게 전혀 안 된다. 적응이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체질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서 까지도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이번 계절 앓이도 내게는 통과의례일 것 같다. 받아들이며 동화되고 적응해 나가는 도리밖에 더 없다.


  오래 전 피자를 먹겠다는 아이에게 내가 계속 제동을 걸었었다. 우리 것 아닌 먹을거리에 너무 빠진다는 우려였다. 그러다가 먹고 싶은 것을 안 먹으면 그 또한 병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슬그머니 눈을 감아주었는데 어느 날 녀석들이 인사로 먹어보라는 말에 한 입 먹어보니 먹을 만했다. 그런데 어느새 내 입맛도 그런 한 입 한 입에 어느새 적응이 되어버렸는지 언젠가는 문득 피자가 먹고 싶기까지 했다. 사람이란 결국 그 시대 그 환경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적당히 합류하여 적응해 가야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계절앓이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에 돌아가는 어느 것 하나도 그렇게 쉽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보기에는 그냥 아주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것 같지만 그것을 겪는 아픔과 고통은 실로 대단할 수 있다. 봄을 열기 위한 긴 겨울 동안의 준비, 열매를 열기 위한 엄청난 인내와 몸부림, 그리고 그것들이 익어가는 것이 어찌 그냥 되어지는 것이랴.


  아이가 자라 소년이 되고 그가 다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는 것 또한 이런 자연법칙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더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버림으로 새 생명을 탄생 시키는가 하면 모천을 찾아 기나긴 여행을 통해 회귀하여 마지막 생명의 값을 하는 연어처럼 하찮은 미물까지도 순리와 질서라는 이름으로 적응하고 조화하고 감내해 낸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사람인데 그냥 훌훌 스쳐 지나듯 값없이 이루어지게 함이 있으랴. 하기야 우리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창조물 모두가 다 똑같이 섭리 아래 이루어진 것일 텐데 우리만을 중심으로 미물이니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폭력일 수도 있다.


  세상 만물이 저마다 몫을 해가며 생존하고 있는데 생명의 가치에 등급을 매기고 주관적 구분을 짓는 것 자체가 월권일 수 있다. 크건 작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대자연의 질서일 것이다.


 나의 계절 앓이는 이런 질서의 깨짐에서 비롯됨일 수도 있다. 인간이란 이름으로 너무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하여 유별남을 보이고 그것이 능력인 양 여긴 것에 대한 대답일 수 있다. 다만 믿는 것은 이런 겪음, 이런 앓이를 통해 보다 성숙한 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이다. 올해 이렇게 한 번 더 앓고 나면 나는 얼마나 더 나다워질 수 있을까. 나의 이 계절 앓이에 하나님은 어떤 사랑을 담아 놓으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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