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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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일상/인니 한인들

막걸리 한 공기에 취한 나

이부김 2010. 4. 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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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한 공기에 취한 나

       

                                                  별과달


      “ 이상하다. 제가 술이 취하는 것 같아요.“

      내 앞에 앉은 여류 시인이 나를 쳐다보며

      “ 왜요. 한잔도 다 안 마셨잖아요.”

      “ 아까는 안그랬는데 지금 앞에 계신 분들이 전부 멋있어 보이네요. “

      “......”

      난생처음 막걸리를 마셔봤다. 재인니 한인문인 몇 분과 자카르타 한국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나보다 한참 연배이신 예총회장님과 몇 분들이 막걸리를 한잔 마시라고 했다. 분위기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네’하고 얼른 받았다. 조그만 밥공기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후루룩 숭늉 마시듯이 마셨다. 맛은 요구르트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따뻬(뿌리 발효시킨 것) 맛이기도 했다.


      양은주전자에서 흘러나오는 막걸리 공기를 받아 놓고 잔 속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 막걸리 속에는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 누룩처럼 녹아져 있었다. 자전거 안장 뒤 칸에 하얀 통 하나 양옆에 두 개의 통이 달고 막걸리 배달하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면소재지에서 만들어진 막걸리는 한얀 통에 담겨져 십 오리나 되는 우리 마을의 구판장 집으로 삼 일마다 그렇게 배달되었다.


      학교가 파한 정오가 조금 지난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신작로에서 막걸리 배달하는 아저씨를 늘 만나곤 했다. 어떤 친구들은 아저씨의 자전거가 지나가면 식빵 냄새가 난다며 자전거를 한참이나 따라가면서 냄새 맡기도 했다. 그러나 난 막걸리가 싫었다. 아니 막걸리 마시는 어른들도 싫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정월 대보름이 이틀 지난 내 생일날이었다. 지신밟기였는지는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꽹과리치고 장구, 북치면서 집집마다 마을을 돌았다.  또 마당윷놀이도 하고 해가 지고 저녁때가 되자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그야말로 흥겨운 어른들이 판을 벌린 마을의 잔치였다.


      그때가 72년도였고 우리 마을에는 아직 전기불이 없었다. 촛불이나 호롱불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그날은 내가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구경한다고 숙제를 못했다. 촛불을 켜 놓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문 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였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술주정뱅이의 고함소리였다. 그의 집은 마을 어귀 산기슭에 있었다.


      그러다가 그 주정뱅이 어른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그대로 술주정하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청출어람이라는 표현이 아깝지만 딱 어울렸다. 술만 마시면 고함질렀다. 아들은 젊었으니 그 소리가 고요한 시골마을에 마이크처럼 울려 퍼져 메아리까지 치면서 쩌렁쩌렁했다. 그 쯤 되면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손님이 있고 초저녁이라도 집집마다 하나 둘씩 켜졌던 불을 끈다.


      아들의 나쁜 술버릇은 술에 취하면 불이 켜진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소리 지르며 술을 더 달라는 둥, 언제 만났을 때 기분이 나빴다는 등 이런 식으로 생트집을 잡고 시비를 건다. 또 문중 어른이고 아랫사람이고 구별 없이 욕하며 고함지르고 동네에서는 힘으로든 고집으로든 아무도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슬프게도 주정뱅이 아들의 집에 바로 우리 집 옆집이다. 아들은 술에 취해 아내를 자주 때렸고 아내는 우리 집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런 날 우리 집도 시끄러웠다. 몇 번이나 붙잡히자 아내는 다른 곳으로 또 찾아 나셨다. 우리가족은 대대로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러니 술 마신 사람들 고함소리만 들어도 겁을 먹었고, 막걸리가 배달되는 날 나는 자주 불안에 떨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그런 유년시절 때문에 나는 막걸리를 싫어했고, 햇살음료도 컵에 부어주면 척, 보고 막걸리인줄 알고 안 마신다. 그런데 막걸리 한 공기 받아 마시고 내가 취한 이유는 어쩌면 유년시절의 그 술주정뱅이 부자가 생각나고 고향의 추억에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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