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여행은 일이고 일은 여행이다

인도네시아 일상/인니 한인뉴스 기고

인도네시아 한인뉴스 2010년 4월호

이부김 2010. 3. 1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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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뿌아 섬 이야기

  

* 다니족을 만나러 가던 첫날

 

“ 저 한국에서 온 피디분이죠?”

“ 네, 김성월선생님입니까?”

“ 네, 맞아요.”

우리는 서로 악수를 나눈 후 가방은 운전기사에게 받으라하고 공항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차안에서 피디는 말했다.

“ 사실 아까 봤는데 이렇게 젊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전화통화 음성으로는 짧고 꼬불꼬불한 파마머리, 츄리닝 걸쳐 입어 엉덩이 펑퍼짐한 그야말로 아줌만줄 상상했거든요.”

그런 소리를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 제 목소리가 원래 노인 같아 만난 적 없는 분들과 통화하면 어른대접 많이 받습니다. “

피디는 말을 계속이었다.

“......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로환이랑 신경통약까지 챙겨왔어요.”

 ‘신경통약’까지 챙겨왔다는 말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와 “왜 지팡이도 하나 가져오지 그랬어요.”

이동 중 도로에 전복된 트럭을 보고서 피디가 하는 말

“ 에헤 저 차 뒤비져가 동태(바퀴)가 하늘보고 뱅뱅 돌아가네. 저래가 어야노”

피디는 경상도 사투리가 어찌나 심한지 대화를 나누면 문득 고향의 오촌 아저씨들이 떠올랐다. 좁쌀영감처럼 자상하고 재미있는 피디덕분에 파푸아섬의 원시인들을 만나러 가는 10일 동안 무섭기나 지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는 곳은 인도네시아 섬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주 큰 섬 파푸아(PAPUA). 이곳은 자바 섬과는 두 시간 시차를 두며 한국과 시간이  같다.

수라바야(Surabaya)에서 저녁을 먹었다. 백수식당 아주머니가 오지에 가면 먹을 것이 없다며 고추장을 쬐끔 포장해 주셨다.

밤11시경 출발하여 파푸아(Papua)섬의 중심도시 자야뿌라의 선따니(Sentani)에서 도착하니 다음날 아침8시였다. 그곳에서 조그마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더 동쪽으로 가야한다. 보딩패스는 색깔로 구분되었고 탑승 시간이 되자 “와메나(wamena)로 가는 빨간색 보딩패스 승객들은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방송했다. 비행기 조정실 안에는 모르겠고 남자 승무원 1명과 승객 17명만 탈 수 있는 작은 비행기였다. 좌석도 시내버스처럼 마음대로 앉으면 된다.

 

와메나공항에 도착했다. 아니, 인터넷으로만 보던 꼬데까(koteka)차림의 할아버지도 보았다. 신기해서 할아버지를 자꾸 쳐다봤더니 나를 따라와서 무서웠다. 우리 도시에서 홀라당 벗고 다니던 늙은 거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맨 처음 자카르타 도착했을 때 그 기분이 바로 지금 이 기분과 같다.


나는 지금 와메나의 한호텔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여기까지 무사히 오게 된 과정이 떠오른다.

일주일 전, 파푸아로 함께 가 줄 수 있냐며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입원 중이었다. 늘 가보고 싶던 곳이라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말렸다.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 찍으면 많은 돈을 지불해야한다고 했다. 그런 일이야 플로레스 고래잡이 마을에서 이미 겪었는데 뭐, 아직도 숲속에는 식인종도 있다는데 그건 가봐야 아는 것이고. 다만 두려웠던 것은 물리면 적어도 3개월 고생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말라리아모기들이 극성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입원중이니 말라리아 예방약은 병원에서 먹으면 되고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아무튼 오지중의 오지, 나는 빨리 가고 싶어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곳 채널을 알아보는데 마침 UI 다니는 딸아이 친구아빠가 그곳에서 군 지휘관으로 근무하다가 한 달 전 자카르타로 발령받았다는데 엄마가 그곳에 가면 부하직원을 소개시켜 주면 그 부하가 도와 줄 것이라고 딸아이가 전해왔다. 그럼 됐다, 됐어!

 

정오 때 조금 후에 오겠다던 사람이 저녁 7시경 호텔에 도착했다. 그분은 그곳 부군수님이었다. 와메나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국법도 중요하지만 풍습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외부인들이 잘못하였을 경우 원주민들의 요구대로 국법보다 훨씬 무거운 풍습법을 따라야하고 또 국법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수님 차가 횡단하는 암퇘지를 치어 죽였는데 원주민들은 암퇘지 젖꼭지 하나에 얼마,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계산하여 군수님은 돼지 한 마리 값으로 천만(1000$)루피아를 지불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위험하다며 촬영기간 동안 군직원과 차량제공 그 외의 것까지 지원해 주셨다, 와메나 곳곳에는 군인들과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순탄했다.


와메나의 모든 물자들은 항공으로 운송된다. 인도네시아에서 3번째로 카르고 물량이 많고 물가는 비쌌다. 경유가 리터당 이만 루피아였고 시멘트 한 포대 가격이 무려 100$로 가장 비쌌으며 담배는 자바섬의 가격과 동일했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외국(네덜란드. 미국. 독일. 인도네시아)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 곳곳마다 교회가 서 있었고 대부분의 그리스 찬들이었다.

와메나의 기온은 아주 선선한 가을 날씨였다. 노랑코스모스들이 잔뜩 피어 있었고 호텔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밤바람이 나에게 싸늘하게 느껴졌다.

 

* 수로바(Suroba)마을과 소금물(Air garam)

 

   

인도네시아 동쪽, 파푸아 섬에는 약 250여 부족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는 라니족, 다니족. 똘리가리족이 살고 있다. 와메나에서 차타고 한 시간 정도 가서 또 숲속으로 한 시간 정도 걸어 수로바 주민들을 만나러 갔다. 수로바마을은 너무 산속이라 아직도 문명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은 그늘진 곳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면 입구에는 전봇대 높이의 망루(삐곤까요pikon kayo)가 세워져 있었다.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감시하고 침입자가 있으면 피리를 불어 부족들에게 알리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을 지나면 강물에 놓인 통나무다리를 두 번 건너야 한다. 강물의 깊이는 5미터를 넘고 황토색물이 차가운 온도로 흐른다. 내가 갔을 때 우기라서 물이 차올라 통나무위로 물이 찰랑거렸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쥐고 맨발로 걸어가니 발이 너무 시리다 못해 강을 다 건널 무렵 감각을 잃는 듯해서 기슭에 빠졌다. 통나무다리는 가느다란 신(sin)나무 하나를 길게 연결해 뒀으며 마을에는 신나무들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공동재산이기도 하다. 다리를 건너서 다니족 중 수로바주민들을 만났다.

 

정말 기이한 차림! 남자들은 모두 꼬떼까(koteka)를 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살리(SALI) 치마를 입고 있었다. 산속에서 이런 모습의 사람들을 만나다니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 아니, 옛날시대로 들어가서 혼돈스러웠다. 그 부족들이 나누는 인사말이 있었다. 악수를 하면서 여자들은 상대방에게 라욱(Lauk)이라하고 남자들은 나약(Nayak)이라고 한다. 그 말은 좋다. 반갑다. 축하한다. 아주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즐거울 때 ‘와 와’라고 소리 질렀다.


마을 기슭에는 돼지 한마리가 모래속의 지렁이들을 파먹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섰다. 모든 집들이 초가지붕처럼 되어 있었고 그들은 집이라고 부르지않고 호나이(Honai)라 불렀다. 호나이 안에는 어두컴컴했다. 호롱불도 없고 둥그런 화덕에 화롯불 같은 불을 피우면서 온기를 데워내고 있으니 천정으로 만들어진 서까래에는 그을음이 반들반들 빛이나고 있었다. 그들이 잠자는 바닥은 부드러운 갈대들이 깔려 있었고 밤에는 가마니때기 같은 것으로 덮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잠을 자곤 했다. 마굿간이라고 표현을 빌린자면 그들에게 비인간적인 표현일지 모르나 적어도 내 보기엔 그랬다.

수로바 사람들은 숙식마저 공동생활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집(HONAI)은 남자들만 자는 곳 여자들만 자는 곳이 분리되어 있었다. 만약에 부부가 함께 자려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자야하는 불편함, 둘만의 장소는 다른 집이나 아니면 들판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건너던 황토색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고 남자들이 떠온 물은 남자들만 마시고 여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했다. 희한하게 여자들이 떠온 물은 남자들에게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성우월주의, 일부다처제였고 족장은 열 명의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족 중에 누가 죽으면 슬픔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손가락이나 귀를 조금씩 잘랐다. 그것도 돌로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다는 것이다. 먼저 죽는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을 남겨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사뭇 들었다. 손가락과 귀를 잘라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문화가 참으로 섬뜩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교회나 성당에서 사람이 죽어도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풍습을 가진 그들을 설득하여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뼈를 가루로 만든다. 그 뼛가루를 담 위에 뿌리면 죽은 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고 집안의 평안을 지켜주며 또 밭에 뿌리면 밭농사가 풍년을 이룬다는 그들만의 미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밥 대신 고구마가 주식이고 반찬으로 야채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가난하게 살아간다. 소금 살 돈이 없어 산꼭대기에 있는 소금물에 바나나 줄기를 담갔다가 어느 정도 절여지면 집으로 가져가서 음식 만들 때 소금대용으로 넣어 간을 맞춘다고 했다. 우리는 두 아낙네와 산꼭대기에 있다는 소금물로 향했다. 길이 없는 가파른 산비탈이 길이었다, 바위를 밟고 도랑물에 첨벙거리기도 하다가 늪에 발목이 잠겨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길은 원래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지나가면 길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면 갈수록 산이 높아 삼림욕이고 뭐고 매미 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나는 호흡이 빨라지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한편 수로바 여인들은 바나나 줄기를 뒷짐 지고 여유롭게 맨발로 잘도 갔지만 나는 내 작은 가방마저 일행에게 건네주고 빈 몸으로도 길길 거리며 올라갔다. 보다 못해 그 여인 중 하나가 여러 번 손을 내밀어 주다가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나를 위해 지팡이 하나를 만들어줬다. 산 중턱쯤 올라갔을 무렵 비가 내렸다. 마침 계곡을 건너야하는데 지붕이 덮인 나무다리가 하나 있었다. 잠시 소나기를 피했다.  다리에서 비를 피하는 동안도 수로바의 여인들은 결혼하면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며 나보다 나이가 절반은 어려 보였는데 담배를 줄곧 피워댔다. 그들의 유일한 기호품이 담배를 즐겨 피우는 것이었고 집 앞에 담배 몇 포기가 심어져 있었다. 잎담배를 말아 피우는 그들에게 피디가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니 아주 행복한 듯이 피웠다. 와메나 사람들에게는 식당의 볶음밥 한 그릇 값이면 담배 서너 갑은 거뜬히 살 수 있었다. 그래서인가 그곳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있었다.                                 

 

산 중턱을 지나니 계곡물이 흘러가고 그 옆 작은 웅덩이에 소금물이 고여 있었다. 소금물은 보이지 않게 흘러나오고 흘러가고 있었다. 가져 온 바나나줄기를 두 여인이 부드럽게 하여 소금물에 담가두었다. 절여지는 동안 나는 물을 맛보았다. 정말 짠맛이다. 조금 후 뻣뻣하던 바나나 줄기가 삶은 토란줄기처럼 흐느적거렸고 간이 딱 맞았다. 나는 그들에게 물을 떠가서 사용하면 더 좋을 것인데 왜 굳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지 물었더니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것이기에 물을 떠가면 안 되고 웅덩이 위쪽에 물이 흘러나오는 곳을 밟고 지나가게 되면 재앙을 겪을 수가 있다며 그들은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소나기를 맞았고 땀이 범벅이 됐으니 내 꼬락서니는 생쥐 꼴이다. 그런데 피디는 소금물 맛을 보고 인터뷰를 하라고 한다. 머리나 좀 다듬고 화장을 고쳐 하자니 그런 몰골로 하는 것이 생생한 장면으로 더 좋다며 자꾸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래, 까짓것 시청률이 잘 나온다면 내 이미지를 이 정도로는 구겨 줄 수도 있지!


 







                                                인도네시아 한인뉴스  - 별과달이 비추는 오지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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