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와 볼펜 한 자루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대학생인 딸아이가 손님이 도착할 때가 되었다며 호텔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다. 딸아이는 법학과 학생인데 시간이 있을 때 한 달에 두 번 정도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통역을 도와주는 회사가 있었고 그 회사에 온 손님들이라고 했다.
나는 자주 이용하는 시내 단골호텔로 연락해 방을 예약하고, 그 호텔로 딸아이를 데려다 주려고 같이 갔다. 단골이라고 해서 내가 그곳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오는 나의 손님은 모두 그 호텔로 숙소를 정한다.
호텔은 동부 자바 말랑시내 중심가에 위치한다. 야자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를 산책할 수 있으며 시내에서 유일하게 경찰들이 안전에 신경 써 주는 호텔이다. 건물은 네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때 지어진 건물이다. 그 당시 인도네시아 라디오방송국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인데 해방되면서 호텔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호텔에는 항상 네덜란드 관광객들이 많이 머물고 있다. 아마도 조국의 추억을 회상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말랑 시외곽지역에는 넓은 해변이 있다. 그 해변에 공장을 신축공사 중이며 모래에서 철을 채취하여 수출하는 사업장이라고 한다. 그 사업장에는 소위말해서 한국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린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었다. 그 공장에 방문할 손님들인데 오늘 밤 호텔에서 묵고 내일 아침 그곳 현장으로 가는 일정이라고 한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고 조금 있으니 손님들이 들어왔다. 남자 세 명이었다. 손님 중에서 깡마르고 안경 쓴 분, 우선 보기에도 빈틈이 없어 보이고 이야기도 잘하는 남자분이 있었다. 그 남자는 글자그대로 말 잘하는 변호사(辯護士)였다. 그들의 일정은 내일 아침 일찍 철 채취 작업현장에 갔다가 일정이 일찍 끝나면 오후에 중부 자바 족자카르타에 있는 보로부두르사원, 말로만 듣던 보로부두르사원을 꼭 보고 싶다며 말했다.
보로부두르는 거대한 불교사원이다. 나도 그곳에 여러 번 가 보았다. 최근에는 다큐멘터리제작팀들과 3 주간 족자카르타에 머물렀었다. 보로부두르, 라고 하면 그때 촬영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을 보았는데 아주 인상적인 게 있었다. 그 탑 속에는 불상이 들어 있다. 구멍 난 탑 속으로 부처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인지 미신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게 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관광객들이 탑에 달라붙어 얼굴은 찌그러지듯이 밀착시켜 부처님의 팔다리를 만져보려고 난리들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중국인 스님이 아주 열성으로 거룩하게 그런 행위를 하고 있었다. 스님뿐만 아니라 불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곳은 아주 웅장한 건물이라 가볼 만한 곳이라고만 덧붙여 말했다.
손님들과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딸아이에게 나는 말했다. ‘법학과 다니는 너에게 변호사와 며칠만이라도 함께 일 할 때 이것저것 질문하고 많이 배울 기회’라고 일러줬다.
일정이 끝나고 딸아이가 왔다. 그 변호사는 딸아이에게 한국 사람으로서 인도네시아법학을 공부한다는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장점은 인도네시아 법을 안다는 것이고 단점은 한국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 주소를 알려주면 한국의 민법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딸아이가
"내용이 많습니까?"
"아니 별로 많지 않아 역 2.000장정도"
그리고 변호사는 딸아이에게 검은 볼펜 하나 내밀면서
“한국의 고시생들은 변호사가 사용하는 볼펜을 주면 참 좋아하는데 그건 변호사의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이 볼펜을 법학생인 너에게 선물로 주는 거야.”
하긴, 가수 지망생에게 가수는 우상이고 법학과 학생들에게는 변호사 검사들이 우상이겠지. 잠시 만났던 분이지만 딸아이에게 장점을 알려주고 단점을 보충해주려던 그 변호사 양반이 참말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가 검은 색 볼펜 한 자루를 내밀었다. 볼펜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볼펜이었지만 선물은 고마웠다.
그런데 그 변호사가 인자하고 자상한 척하면서 볼펜까지 주던 그 변호사가 며칠 동안 딸아이를 통역사로 고용하였으면서 통역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그냥 한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딸아이 말에 의하면 지금 가진 돈이 없는데 한국에 가서 송금해 줄게 하더란다. 며칠 동안 일해 놓고 빈손으로 돌아온 딸아이를 보니 화가 치밀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변호사의 언행이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변호사라면 배울 만큼 배운 양반이 외국에 와서 그것도 대학생이 짬을 내서 하는 아르바이트인데. 돈이 몇 푼이라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사를 고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받은 명함에 적힌 한국의 있는 주소로 연락하였다. 변호사라서 그런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선변호사에게 이야기 하여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을 때 그때 변호사가 갔던 그곳의 공장은 부도가 났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수백 만원짜리 볼펜도 아닌 것을 설령 수백만원짜리라고 해도 그건 자신이 선물로 준 것이지, 어떻게 그 볼펜 한 자루로 학생의 수고비를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였는지,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도 한 일이다. 요즘 그 변호사는 어디에서 어떤 사람을 변호하고 있을까,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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