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폭탄, 유가족을 만나고
2002년 10월 12일 밤. 환상의 섬 발리, 발리에서도 꾸따(kuta)는 번화가이다. 꾸따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운집해 있는 곳인데 그런 황홀한 불빛을 제 1차 폭탄테러가 흔들어 놓았고 3년 후 제 2차 폭탄테러까지 있었으니. 그 폭탄이 터지면서 발리 사람들의 웃음을 절규로 바꾸고 가슴을 찢으며 그들이 담아 놓은 꿈의 항아리마저 깨뜨렸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 폭탄 테러가 남겨 둔 아픈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한 미망인을 만나려고, 내가 만나려는 여인의 이름은 로만 런찌니 나이는 35세 남편의 직업은 운전 기사였는데 제 1차 발리 폭탄테러 때 폭탄이 터진 그 레스토랑의 운전 기사였다고 한다.
어스름한 저녁녘,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섰다. 담벼락 아래는 키 작은 풀들이 자라고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 모기들이 날아다니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여름 방학 때 만나는 시골 풍경들이었다. 나는 추억속의 한 장면을 걸어 가는 기분이었다.
< 미망인과 아이들>
그 여인의 집은 벨이나 노크할 대문이 없고 곧바로 마당이었다. 그것도 마당이라고 해야하나?
설령 논둑이라 해도 미니스커트 길이만큼의 처마로 덮여 있었으니 마당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현지인 친구와 먼저 악수를 나누던 여인은 진회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아주 강한 첫인상과 상당히 활동적인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여인은 나와 악수를 나눈 뒤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느닷없이 자신의 앞의 머리카락이 없어 모자를 썼는데 이 머리카락은 가발이라며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놀랐고 밝지 않은 전등불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정말 가발이었다.
인터뷰를 해야겠는데, 앞마당의 개구리들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키 작은 옷장 2개, 그 위에 노트북 모니터 만한 TV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힌두교 작은 제단과 작은 액자 속에 남편의 흑백 사진이 놓여 있었다.
방바닥은 겨우 발 들여놓을 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2인용 매트리스가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매트리스는 아무래도 다목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오늘처럼 손님이 오면 카펫으로 아이들이 엎드려 공부하면 책상으로 그리고 밤에는 침대로, 다시 말하면 방이 콧구멍 만했다. 게다가 시끄러운 개구리들 소리 때문에 방문을 콱, 닫고 선풍기도 없었으니 그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내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여인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 없고 이것 하나 뿐이라며 빛 바랜 흑백 사진 속의 남편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남편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쉬는 날이면 아이들과 꾸따(KUTA) 해변으로 자주 가곤 했었는데......하며 한참을 그렇게 독백하듯이 하더니 고개를 들었고 눈을 깜빡거리는데 이마의 땀방울과 눈에 고였던 눈물 중에 무거운것 부터 차례대로 매트리스 위에 떨어졌다.
인터뷰 한답시고 남의 아픈 상처를 잔인하게 건드린 나,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에 비친 내 모습, 지금 이일을 하고 있는 내가 밉고 싫었다.
순간,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두근거려 얼른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둘 곳 없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공책에 코 박고 숙제하는 막내에게 멈추었다. 반만 피우다가 버린 담배꽁초 길이의 짧은 몽당연필을 쥐고 쓰는 아이의 손에서 내 시선은 굳어 버렸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바깥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그 집을 떠나오면서 나는 몽당연필을 쥐고 쓰던 막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따라 나오며 나를 바래다 주던 그 여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내 가진 언어들을 찬찬히 떠 올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것도 한국말이 아닌 인도네시아 말로. 바로 그거다, 남편과 자주 갔다던 '꾸따 해변' 드디어 해 줄 말이 떠 올랐다.
“ 다음에 내가 발리에 오면 아이들과 함께 우리 꾸따 해변으로 가요”

< 2002년 10월 12일 폭탄 희생자 추모비>
다음 날 제 1차 발리 폭탄 폭발 희생자 추모 비에 갔었다. 추모 비에는 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나라 별로 적혀 있었다. 그 중에 그 여인의 남편 이름을 보는 순간 어제 밤의 만난 여인과 아이들
셋이 떠올랐다.
어제 막내 손에 쥐어 줄 때 좀 더 많이 쥐어주지 못한 것이 그저 미안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여인이 용기를 잃지 않고 어린 딸 셋과 잘 살아 가길 진심으로 바라며 어제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 다짐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