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 자신의 뜻과 현실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많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럴때
뒷통수를 몇번 치고 난 다음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나의 계획을 위하여 떼를 쓴다.
내가 떼를 쓸때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질때까지 꾼준히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나름대로 ‘기도’라고 한다.
얼마 전 나는 하던 PC방을 팔고 다른 아이템을 하려고 구성중이었다. 그래서 가격을 흥정하는
과정까지 갔었다. 그런데 성질 급하고, 흑백이 분명해야 하며 '빨리'라는 습관속에서 길들여진
나는, 느긋하게 시간을 잡아 먹으면서 가격을 밑바닥부터 흥정해 올라 오는 중국인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의 상술에 몸서리를 친다. 내가 원하는 날짜까지 결정이 나지
않자, 자존심이 상해 안 팔기로 맘을 먹었다. 그런데 지금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중국인은
내가 하던 자리에 장사가 잘 되자 자신이 PC방을 하려고 맘을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가 바로 계약 기간이 끝나는 15일 전이었다. 그런데 급하게 스케줄이 잡여 KBS-TV에서
촬영을 나왔다. 그것도 7시간이나 먼 거리에서 6일 동안 촬영하여 PC방 옮길 곳도 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9일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팔기로 하였다가 다시 거머쥐어여한다는 그 부담감! 그러나 한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한쪽 문이 열린다는 것을 나는 믿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앞에는 바다, 뒤에는 애굽 사람들이 잡으러 따라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과 지금의 내 입장이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먼동처럼 시간을 늦추진
않는다. 그 때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홍해를 가르는 기적! 나는 그런 것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태어나서 제일 큰 맘먹고 지금의 도시에서 가장 중심가 더 큰 곳으로 옮겼다. 주머니속에
든것을 모두 털었다. 그 가게 주인은 부자였다. 큰 호텔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가에서 현 시가로 루피아 20억 하는 점포 21개, 한 거리의 점포를 거의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난 중국인 2세였고 91년도에 부도가 나서 빈손이었으며 그래서 힘들때
사람들이 쉽게하는 전형적인 생각, 자살을 몇전 시도하다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내일 아침 식사 때 우리 부부를 초대하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나갔었다. 그래도 초대 받은 입장에서 정장을 입고
나갔다. 그도 아내와 함께 나왔다. 그가 나를 초대한 곳은 길가 포장마차였다. 탁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행주인지 걸레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으며 우리 네 사람이 받는 밥그릇은 이가
한 군데씩 빠져 있었다.
시원한 홍차를 시켰는데 투박스런 컵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며 주먹만한 크기의 얼음
한덩이가 들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8 년만에 처음으로 나는 그런 곳에서 밥을 먹었다. 그것도 한국돈 300원짜리
비빔밥을. 다음 날 그는 또 내일 점심 식사로 국수를 대접 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 점심 식사 약속을 아직도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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