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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일상/인니 종교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으면 넌 우리 편

이부김 2014. 8. 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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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으면 넌 우리 편

 

  김성월

 

자카르타에서 술라웨시 섬 우중빤당에 경유하면서 나는 손목시계의 시간을 한 시간을 더 빨리 돌렸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암본(Ambon)에 내리면서 나는 또 한 시간을 더 빠르게 돌렸다. 공항에서 손목시계의 태엽을 감으면서 낯선 곳을 살피는 건 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다.

 

암본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중이었다. 암본에는 원래 택시가 있었는데 1999년 종교분쟁이 일어난 후 택시가 사라졌고 지금처럼 6인승 밴이 택시로 사용되고 있다. 자카르타 공항에서도 이런 차 무서워서 안탔는데 이 낯선 곳에서 이런 차가 택시라니 할 수 없이 타야지 뭐, 그래서 탔다. 운전기사는 영화에 나오는 뒷골목의 사나이처럼 훤칠한 키 아주 짧은 머리에 한쪽에만 귀걸이 그리고 팔뚝에는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아참 입술도 두툼했다. 나 혼자 그런 사람의 차를 탔으니 나는 간이 부어 팽창한 건 분명한 것 같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한 시간 걸린다고 했는데 자는 척 할까, 아니지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혼자 별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뒤로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나는 무서워 움찔거려지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공항을 벗어나서 해

변도로를 달리고한적한 곳의 모퉁이를 돌더니 차의 속도가 줄이고 기사가 손님인 나에게 물었다. ‘노래를 틀어도 되는지 복음성가인데 괜찮은지내 대답도 듣지 않고 이미 노래를 틀었다.

나오는 노래가 마침 내가 아는 찬양이었다. 14년 동안 불렀으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흥얼거렸다.

기사는 나를 보더니 외국인 같은데 약간은 자와 억양이고 인도네시아 노래를 부를 수 있어 약간 의아했다며 말했다. ’나 참 외국인이면 외국인이지 외국인 같다는 말은 또 뭐야하긴 내가 동부 자와에서 사람들과 오래 교제하다보니 억양이 그곳 사람들과 같겠지. 가끔 나의 이름이 김성월이라는 게 참 다행이다 싶을 때도 더러 있다. 한국인들은 김씨가 많으니까.

 

그렇기나 말기나 기사와 분위기가 이정도 쯤 되면 지난번에 왔을 때 궁금했던 것 이번에는 꼭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CD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나고 나는 기사에게 예전에 종교전쟁(1999~2010) 일어났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이른 아침 앙꽂(미끄롤렛) 시내버스 기사가 주차를 했고 주차 맨이 주차비를 달라고 하자, 앙꽂기사가 아침이라 아직 돈이 없다며 주지 않자 화가 난 주차 맨이 앙꽂(마이크로형버스)기사를 한 대 때렸는데 맞은 기사가 도망가면서

그리스천이 이슬람 공격 한다

이렇게 외치자 사람들

이 와락 몰려 난동을 피우며 폭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에서 찬찬히 정리하고 있는데 기사가 창문을 열더니 손짓하며

폭동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에요. “

그곳은 시내 가까운 곳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나는 다큐멘터리 취재하는 것만큼 신났다.

폭동이 났을 때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떻게 구분해요? “

마을에 어느 종교가 더 많은지에 따라 그 종교가 우선이 되며 적군인지 아군인지 확실하게 구분하여 죽이던 그 기준을 말해 주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지역을 지날 때 그들은

너 종교가 뭐야?”

이슬람교

그러면 코란, 외워봐 큰소리로

그가 이야기 하는 중간에 나는 끼어들어 질문했다. 

만약에 코란을 더듬거리거나 못 외우면 어떻게 되나요? “

그는 운전대 잡았던 왼손을 들더니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에게 또 말 걸었다.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되나요? “

네 물어보세요.”

폭동이 났을 때 당신도 사람을 죽이고 했어요? “

미안합니다만 저도 그랬어요. 살기 위해서 대항하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요. 그땐 살자고 목숨을 거는 그런 때였지요.”

그러면 기독교 지역에서 행인이 지나갈 때는 뭘 해보라고 하나요? “

주기도문을 외워 봐!”

기도문을 다 알아도 무기를 들고 윽박지르면 무서워서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지요.”

 


순간 암본이라는 곳이 암흑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 폭동이 났을 그 상황에 내가 있었더라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실험을 해 봤다.

“ Bapak Kami yang di surga di kuduskan........selama lamanya Amin”

기도하다가 중간에 더듬거린 부분이 있는데 이래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물었더니 기사는 웃으면서

이부(미세스)는 살아남을 수 있어요. 또 찬양도 부를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한국에는 주로 어떤 종교가 많은지 물었다. 여러 가지가 있으며 종교가 없는 자도 있다고 하니까 기사는 약한 인간이 어떻게 신을 믿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지?’ 하며 나에게 묻듯 독백을 했다.


렌터카 기사는 원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폭동이 났을 때 가족을 잃고 슬픔에 젖어 방황하다가 교사직을 그만 두고 렌터카 운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종교분쟁의 경험담을 현장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지면에 다 적을 수는 없다. 분쟁의 기간이 약 11년에 걸쳐 길어지자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시내 광장에 세계 평화의 징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후 사람들도 지쳤고 분쟁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먼 길을 어떻게 갈까 고민했는데 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다보니 금방 온 것 같다. 차에서 내려 돈을 주면서 기사의 얼굴을 보았더니 나에게 이야기 해 주느라고 그때의 고통스럽던 기억을 되새김질하였는지 그의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주기도문 인도네시아어(Doa Bapak K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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