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57세 할머니와 만남
[ 오지는 모험과 위험을 낳는다 ]
수마트라 섬, 팔렘방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 마음과 몸은 조금씩 흥분되어 갔다. 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독이 든 코브라처럼 고개를 쳐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실은 집을 나서면서 인도네시아 지도위에 빨간 압정 하나를 꽂았다. 그 압정은 내가 직접 가 본 곳을 표시하는 건데 꽂아놓고 보니 큰 섬 아홉 개를 다 가본 셈이 되었다. 작은 목표를 달성했다는 기쁨에 웃음이 헤죽헤죽 나왔고 혼자 웃기엔 기내가 너무 조용해서 책 펴 들고 뚝뚝 흐르는 웃음을 책갈피마다 끼워 넣었다.
수마트라 섬 OKU군 인구센서스팀에 의하면 올해 157세 할머니가 있다는 정보였다. 센서스팀장과 통화하면서 주소를 받았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낯선 동네를 여러 번 지나는 동안 태양은 저녁노을이 되었고 어둑어둑해지는가 싶더니 금세 깜깜한 밤이 돼버렸다. 인도네시아 시골길은 정말 가도 가도 십리 길이었다.
빨렘방(Palembang)에서 할머니계신 마을까지 7시간이면 된다고 촌장이 알려줬는데 9시간이 지났다. 사람들에게 물으면 곧장 가라는 소리만 했다. 좁다란 시골길 자동차가 휙, 하고 지나가면 어둠은 스케치되듯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길섶의 풀들이 자동차불빛에 일렁거리는 시골밤풍경은 꼭 회색빛으로 칠해지는 수채화 한 폭 같았다.
중간에 운전수가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너무 늦어지니까, 기다리던 촌장도 지쳤는지 마을 입구로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차를 탔던지 촌장 집 안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어도 차타고 가는 것 같다. 촌장은 우리에게 홍차를 대접했다. 달달한 홍차 한잔을 머금었다. 촌장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길을 헤매던 그곳을 조금만 지나쳤더라면 핸드폰통화가 안 되는 우범지역이었다며 지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트럭 한대가 길을 물었고 사람들이 알려 준대로 갔더니 사방이 고무나무 밭이었다. 고무 밭은 미로처럼 되어 있어 사방을 분간 못하고 있던 중 여러 명이 나타나서 해코지를 당했다. 트럭의 탔던 두 사람 옷가지를 벗겨 알몸으로 고무나무에 묶어 놓고 트럭의 물건을 강탈해 가버렸다. 이틀 후 고무나무에 수액 받으러 갔던 인부들이 발견하여 구출됐다는 것이다.
촌장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기사가 길 구멍가게 가서 콜라 사면서 길을 물었다. 남자 둘은 차 앞에까지 와서 도로에 웅덩이가 여러 개 있고 길은 좀 어설퍼도 큰 도로보다 훨씬 지름길이라며 어설픈 도로가 자기네 탓인 양 미안해하면서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런데 여자의 직감이랄까, 일러준 대로 가면서도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는 촌장에게 전화 걸어 운전기사를 바꿔줬다. 기사는 전화를 끊자마자 도로 중간에서 차를 휙 돌려 왔던 길을 한시간이상이나 되돌아갔다.
우리가 길을 물었던 그곳 사람들은 외부차량이 길을 물으면 일부러 외진 곳으로 가르쳐 준 후 하릴없이 노는 일당들에게 미리 정보를 전화로 알려주는 수법을 사용한다고 했다. 친절한 미소 안에 포장된 그들의 작전(?) 수렁에서 빠져나온 행운,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은 운전기사가 사 마신 음료수에 그들이 뭘(?)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딴중마스마을 사람들은 늦은 시간인데도 한국인인 우릴 구경하겠다고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나와 피디가 대화를 하면 한사람이 따라하고 그 옆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아니?’ 하고 묻고 수군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것뿐인가, 우리가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면 손에서부터 입까지 그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거미줄처럼 끈적거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귀찮게도 느껴졌지만, 그 늦은 밤 또 한 시간이상 차타고 호텔로 갈 용기도 기력도 없었다. 그날은 촌장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밤이 이슥토록 밖에는 반딧불과 귀뚜리미가 음악회를 열었고 방 안에는 모기와 파리들이 열광했었다.
[ 157세 할머니와 만남 ]
다음 날 157세 뚜리나(Turina)할머니댁으로 갔다. 촌장이 오리들에게 먹이 주던 할머니께 우리 소개를 했다. 할머니는 조금 남은 오리먹이통을 내동댕이치듯 던지고 반갑게 내 손을 잡으셨다. 인터넷 기사로만 봤지 실제로 만나보니 정말 157세인가 싶을 정도로 정정했다. 할머니는 1853년 5월 5일 동부 자바 점버르(Jember) 출생이며 아버지는 네덜란드인 어머니는 자와인이었다.
할머니와 무슨 이야기부터 나눌까 망설이다가 촬영구성안을 꺼냈다. 몇 장 넘겨보는데 할머니는 며칠 전에 꾼 꿈이라며 이야기하셨다. “비행기가 날아가다가 서류뭉치를 떨어뜨렸는데 주워보니 이상한 글자들이었다. 바로 이런 글자였다“며 내가 든 한글을 보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꿈이 현실이었다며 아주 즐거워하며 웃으셨다. 그런데 이가 없었다.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할머니의 몸매는 기역자였다. 체력은 강했고 주로 소식(小食)하며 금식도 자주하고 운동을 많이 하시는 편이라고 한다. 집에서도 설거지와 간단한 빨래와 마당 쓸기도 거뜬히 하셨다. 집 앞 텃밭에 심어 놓은 빠레(Pare)는 치매예방효과가 있어 야채와 볶아 즐겨 드신다고 했다. 수세미 모양으로 생긴 빠레가 어떤 맛인가 하고 하나를 따서 한입 베어 물었다. 첫맛은 찔레처럼 상큼하다가 뒷맛이 쓰면서 혀끝을 휘감았다. 할머니의 시력은 좋은 편이었다. 예전에는 한 번 만에 실이 바늘귀구멍으로 쑤욱~ 들어갔는데 이젠 예닐곱 번은 해야 실을 꿸 수가 있다고 한다.
지난 밤 나는 할머니가 일곱 번이나 결혼 했다는 걸 촌장에게 들었다. 그 이유를 조심스럽게 질문했고 대답은 자식을 낳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곱 번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자식을 낳지 못했고 지금 할머니와 함께 사는 사람은 양자였다. 며칠을 겪어보니 할머니는 강단 있는 분이었다. 자식을 낳고자 했던 열정도 강했고 아직도 일본인들에게서 배운 일본어를 조금 구사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어는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건 네덜란드 시대 때 밭으로 차 잎 따러 다니던 그 종살이가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네덜란드인과 결혼하여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네덜란드 정부가 물러가면서 남편은 할머니만 두고 자식들을 데리고 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숨겨도 좋을 이야길 털어 놓으셨다.
딴중마스 마을에는 장수노인들이 많았다. 노인들은 한곳에 모셨다.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뚜리나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였는데 지금도 할머니”라고 그리고 장수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리들에게는 절대로 알려주질 않는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그 할아버지 옆의 할아버지께 질문 드렸다.
" 할아버지처럼 구십이 넘어도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그거야 나를 창조해주신 분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몸을 돌보고,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해! 나는 이제까지 해보다 늦게 일어난 적이 없어!"
촬영을 마치고 떠나오는 나에게 할머니는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당신처럼 꼭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고맙다며 "할머니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하고 인사했더니 참 좋아하셨다.
157세 할머니를 보니 갑자기 세계 3대 거짓말이 생각난다. 처녀 시집 안 간다. 장사꾼 손해보고 판다. 노인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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