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행사 촬영하면서 - 2
그래, 이틀만 궁녀가 되어주자
오늘은 왕궁에서 나에겐 궁녀 옷 제작진에는 남자복장을 입혀줬다. 그러면서 내일도 차림이 같다고 했다. 그건 우리가 왕궁에서 촬영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손님이 아니라 잠시 궁의 식구가 되는 것이란다. 그래,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는데 솔로 왕궁의 법도를 따라 이틀만 궁녀가 되어주자.
궁녀 옷(Kemben)은 치마처럼 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으로 둘둘 말아 흘러내리지 않도록 복부에 붕대를 여러 번 감았다. 그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했다. 가슴에는 궁녀들의 계급을 드러낸 천으로 한 번 더 둘렀다. 보통여자들은 끄바야(kebaya) 걸치지만 솔로의 궁녀들은 끄바야를 걸쳐 입지 않는다. 궁녀 옷이라고 입혀 주기에 입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이에 왕궁에서 양어깨를 드러내고 수천 명 사이를 활보한다는 건 여자로서 아름다운체험(?)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솔로왕궁(Keraton surakarta -Hadiningrat) 제 13대왕 시누훈 빠꾸부워노(SINUHUN Pakubuwono XIII)의 즉위 6년째 기념일 아침이 되었다. 검은색가방을 둘러멘 남자가 앞서고 우리는 뒤따랐다. 왕궁 안의 네 번째 문을 통과하니 하인(Abdi Dalam)문지기가 말했다. 다섯 번째 문을 통과해야하는데 그곳은 귀빈들만 드나드는 곳이란다. 하긴 우리가 귀빈이니까 이렇게 드나드는 것이 아닐까. 왕과 덕담 나누는 사람들은 얼핏 봐도 어깨와 가슴에 훈장이 더덕더덕 달려 있어 왠지 귀빈 같고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서서 남자들이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댔다.
왕, 왕, 왕 만인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왕!
오늘 같은 날 왕은 얼마나 부푼 심정일까. 친지와 자녀들, 하인 천여 명들이 엎드려 축하드릴 것이고 외국에서 사절단도 왔으니........ 귀빈들과 덕담을 나누고 있는 왕을 주시해 보다가 대화가 끝날 무렵 나는 쪼르르 왕 앞으로 달려갔다.
" 시누훈(왕)! 축하드립니다. 지금 어떤 기분이세요?"
" 으....... Merasa sedih sepi(슬프고 외로운 느낌)"
참으로 의아한 대답을 들고 솔직히 나는 흥미로웠다. 아주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한발 더 다가가서 나지막하게
" 왜? 슬퍼요.......?"
" 이런 행사가 일 년에 여덟 번이나 있는데, 설날........ 그때마다 난 혼자........"
“ 네....... ”
참깨 털어내듯 술술 털어내는 가슴속의 언어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때론 밝은 표정으로 더러는 호기심 많은 얼굴로 들었다. 시누훈(Sinuhun)은 4년 전 혈압으로 쓰러져서 회복이 되었지만 발음이 약간 어눌했다. 나와의 이야기가 끝나자 어떤 분이 왕과 뺨을 비비면서 인사를 나눴다. 남자끼리 뺨을 너무 세게 문지른다 했더니 순간 탁, 하고 왕의 안경오른쪽이 안경다리가 떨어졌다.
왕을 알현하러 천여 명의 하인(Abdi Dalem)들이 멀리 마당에서부터 홀 위의 왕의보좌까지 앉아서 걸어갔다. 이상한 건 왕궁행사 모든 걸 궁녀들이 주관했다. 왕이 등장하는 문 앞에서 창을 들고 대기하는 것부터 향 피우고 춤추는 것까지 모두 궁녀들이 했다. 남자하인들은 그저 무릎 끓고 앉아서 궁녀들이 하는 것 쳐다보고 박수나 쳤다. 우리조상들도 그랬을까?
행사가 마치자마자 사람들은 왕과 함께 사진 찍으려고 엄청 몰려들었다. 그런데 피디는 행사직후소감을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봐도 왕이 너무 바빴다. 피디는 왕비에게라도 듣고 싶다며 나에게 졸랐다. 나는 왕비에게 접근하여 말을 건네자 한마디로 냉정하게 거절했다. 기분이 좀 상하더라만 참았다. 드디어 행사가 다 끝났다. 이제왕은 손님들의 왕도 하인들의 왕도 궁녀의 왕도 왕비의 왕도 아닌 우리 ‘VJ특공대’ 제작진의 왕이다.
왕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춤추던 궁녀(Tari Bedoyo Ketawang)들과 왕은 정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 시누훈(왕/62세) 오늘 많은 행사로 피곤하시겠지만 전 약속 지키러 왔습니다.”
“ 아참, 약속을 했었지요.”
어제 대화중에 취미가 키보드 연주하는 것과 자동차 정비와 꾸미는 것이 생각났다.
“ 우선 키보드로 음악을 먼저 들려주세요.“
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철망 문을 열고 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입구에는 CCTV가 화면이 보였고 넓고 둥근방이었다. 한쪽 벽면에 키보드 일곱 대가 놓여 있었다. 연주는 좋아하는 민요 끄론쫑(Keroncong)중의 벙아완솔로(Bengawan Solo)를 들려줬다. 연주가 끝나고 나는 훌륭하다며 박수를 쳤다. 그 다음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자동차는 일곱 대였다. 그 일곱 대는 모두 선물로 받은 차였다. 차고 앞에서 왕자를 직접운전해서 등교시킨다며 끔직한 사랑을 자랑을 듣다가 아무도 없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 후계자를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 내(62세)가 죽으면 내 아들(8세) 저 아이가 후계자가 될 것이요.”
하면서 우리를 따라다니던 왕자를 가리켰다. 이제 왕과의 촬영이 끝났다.
◀왕자 GRM.Suryo Aryo Mustiko
그때 문밖으로 왕비가 나오더니 왕자를 부르고 우리에겐 끝났으면 빨리 가라는 식으로 느껴졌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늘 궁녀들만 대하더니 내가 궁녀 옷 입었다고 궁녀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하는 반발심이 싹텄다. 나는 왕에게 왕자와 잠시 놀아도 되겠는지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와 인터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길 나눈 후 사진도 함께 찍으면서 옆에 앉아있는 왕비를 힐끔 훔쳐봤다. 그리고는 돌아올 때쯤 왕비에게 농담하듯이 말했다.
“ 죄송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 네 무엇입니까?”
“ 나는 한국 사람이고 여기에 온 이유는 솔로의 왕이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다는 걸 한국시청자들에게 알려주려는데,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세 번이나 마치 이웃집 수탉 쫒아내듯이 했나요?”
“ 오, 제가 언제. 그랬다면 미안합니다.”
공주
“ 그럼, 지금 인터뷰 할 수 있어요.”
G.K.R Timoer Rumbai Kusuma Dewayani ▶
" 네 그래요."
인터뷰 핵심만 받으려는데 얼마나 열심히 이야기하는지 안 시켜줬으면 정말 섭섭할 뻔했다는 표현을 이럴 때 하는가보다. 보통 인터뷰가 길어지는 것같아 피디에게 사인해 주려고 카메라 액정화면을 보니 배터리가 다 되어 꺼지려 했다. 카메라가 꺼져도 이야기 멈출 때까지 카메라를 들고 있자고 했다. 이 비밀은 피디와 나만 아는 것인데 이렇게 폭로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
인터뷰가 끝난 후 나는 웃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고 농담섞어서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두리안 같아요. 겉은 가시가 있어 날카롭지만 힘들게 마음을 열어두고 보니 이렇게 좋은 분이군요.”
이런 연유로 왕비의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섯 번째 문부터 나오기 시작하면서 왕궁을 빠져나왔고 나는 이틀간 입었던 궁녀 옷을 벗어 내던졌다. 아니다, 고이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TV 취재.촬영 > 취재 현장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깔리만탄(보르네오)섬으로 간다. (0) | 2010.09.15 |
---|---|
루왁(사향고양이)커피(Kopi Luwak) 생산지로 (0) | 2010.09.11 |
한국인삼 맛본 솔로왕국의 시누훈(Sinuhun) (0) | 2010.07.20 |
발리에 이렇게 예쁜 마을 있다 (0) | 2010.06.21 |
발리의 독특한 장례풍습 뜨루냔마을 (0) | 2010.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