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여행은 일이고 일은 여행이다

좋은 글 모집/늘샘최원현수필

날지 못 하는 새

이부김 2008. 11. 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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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 하는 새

                  최원현


어항 속을 들여다본다.
뽀글대는 물방울 곁을 오가며 한가로이 부유하는 색깔 고운 고기들.
세상에서 저보다 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있을까 싶게 한껏 부러워지는 모습이다. 먹을 것 걱정, 추위, 더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저들의 삶은 참으로 축복 받은 삻일 것 같다.
헌데 저들에게선 꿈틀대는 생명의 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으니 웬일일까?
그렇게 보니 숨쉬고, 헤엄치며 사는 저들의 삶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살아지는 모습으로만

보이는 것 같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은 직선의 곧은 길이기 보다는 수없이 꼬불거리는 길이요,

넓어졌다가도 좁아지고, 내림길이다 싶으면 오름길이 되는 굴곡과 변화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지 모르지만 순탄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어항 속 고기들의 삶은 어쩌면 정상적인 삶이랄 수 없을 것만 같다.

 
얼마 전 일이다.
햇볕이 따사로운 주일 오후, 교회에서 돌아오는데 아파트 옥상에서 한 떼의 아이들이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위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옥상으로부터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깜짝 놀라서 떨어진 곳으로 가보니 아니 이건 병아리들이 아닌가. 노란 부리와 온몸에 보송보송한 노란 털옷을 입은 병아리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바둥대고 있고, 어떤 놈은 이미 머리가 깨어진 채 숨이 끊어진 것도 있다.
아이들이 모두 내려왔다.
아이들은 내 존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저마다 떨어진 병아리에게

달려가더니 하나씩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아직 살아 있는 병아리를 든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고, 죽은 병아리의 임자는 시무룩해 한다.
나는 그런 그들이 이상하기만 했다. 살아 있는 것이 저토록 반갑고 기쁜 것이거늘 왜 저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나 싶어서였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한 아이를 붙들고 '너희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니?'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아이들도 들었나보다. 아이들이 우 모여들더니 저마다 자랑스럽게 한 마디씩 해댄다.
나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들 느꼈다.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이럴 수가. 어떻게 저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이들 얘기론 저희들은 지금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병아리를 한 마리씩 사서 옥상으로 올라가 위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려 아파트로부터 가장 멀리 날아가는 병아리가 우승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아이들의 생각으로 있음직하다. 그러나 그들이 떨어뜨린 병아리들은 대개 날기는커녕 그대로 곤두박질 떨어져 죽는 수가 더 많았다. 그런데 죽지 않은 병아리로 2차 게임을 하는데,

병아리를 다시 떨어뜨려서 맨 나중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는 병아리 임자가 이기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생명을 순간적 오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아이들.
자신들의 놀이감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가는 병아리의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
저 아이들의 가슴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을까 싶어 눈앞이 캄캄해지고, 두 다리가 맥없이 풀어져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긴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나고 말았다.
어쩌면 저 아이들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바로 저들의 부모 된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기억이 떠오른다.
뒷산에서 꿩 새끼 두 마리를 잡아 왔다.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방으로 가져다 헌 체를 덮어 두고 좁쌀을 먹이로 주었다.
그러나 먹이는 먹을 생각도 않고 줄곧 체 가장자리만을 빙빙 돌기만 했다.
그날 밤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꿩 새끼의 어미가 수꿩과 함께 밤새 소리 지르며 우리 집을
뺑뺑 돌며 울어댔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제 어미의 소리를 들은 새끼 꿩들은 미친 듯 더욱 울어댔다.
아침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꿩은 워낙 성미가 급한 동물이라 가둬 놓으면 쉽게 죽는다고 한다. 결국, 다음 날 할머니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남은 한 마리를 가져 왔던 곳에 다시 갖다 놓았다.
계속 나의 주위를 돌며 따라오던 어미 꿩이 제 새끼를 인도하여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 죽은 새끼 꿩도 그곳에 묻어주고 돌아오면서 못할 짓을 했다는 죄스러움으로 그 후 오랫동안을 내 어린 가슴엔 뉘우침과 작은 슬픔의 가닥이 솔솔 바람처럼 일었었다.
어미의 자식 사랑, 자식의 어미에 대한 그리움은 사람이 아니 어떤 미물일지라도 생명이 존속되는 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찌 생명을 귀함과 천함으로 구분할 수 있으랴.
얼마 전 동네 아파트에서 공부 부담을 못 이긴 여학생이 투신을 했었다. 시험에 대한 두려움, 부모의 기대에 대한 부담이 집체보다 큰 바위의 무게로 가슴을 누르자 그녀는 그 무게를 감당 못한 채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학생이 내 자식, 내 가족이 아니라는데 우선 안도하고, 나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또 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생각을 굳혔다.
그러면서도 죽은 학생에 대하여 조금의 죄스러움조차 느끼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면서도 그저 직접 나와 상관없기만을 바라는 극도의 자기 본위에 완전히 젖어 있음이리라.
가슴을 잃은 아이들.
그래, 그들의 가슴엔 도시의 횟가루와 기성인들의 이기심이란 차가운 돌멩이만 가득 채워져 있기에 산들바람의 길도, 따사한 햇빛 한 자락의 자리도, 자연의 새 소리 들리는 작은 창문 하나도

들어 설 수 없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어항 속을 들여다본다. 다시 보니 고기들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아는 것 같다. 자신들의 삶의

깊이와 넓이, 즉 분수를 아는 삶이라고나 할까?
허나 어찌 그렇게 길들인다고 신으로부터 부여된 본래의 삶을 아주 잊을 수 있으랴. 밤새 체 안을 돌며 아파하다 숨져 간 새끼 꿩처럼 그렇게 길들여질 수 없으면 새 길로 들어설 수 없음이 아닌가.
아이들이 옥상에서 떨어뜨린 병아리 마냥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떨어뜨리고 있음은 아닐까.
병아리의 날개도 날개라고, 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 같은 자기만의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만화 영화의 주인공 가제트 형사처럼 만능의 장치라도 해준 것으로 착각하고, 아파트 옥상보다

높은 기대와 요구의 벼랑에 저들을 세워놓은 채 숨막히게 하고, 지신조차 알지 못하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날개의 아이들을 오히려 날아오르게 하기보다는 추락케 종용했던 것만 같다.
세상에 있는 것이 어찌 날개만 있다고 다 날아오를 수 있는 것뿐이랴.
창문을 여니 잎 진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서 실 끊긴 연 하나가 매달려 바람을 타며 날아오르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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