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여행은 일이고 일은 여행이다

인도네시아 일상/인니 한인뉴스 기고

2008년 11월호

이부김 2008. 11. 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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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야 또 만나고 싶다. 

 

                                              글/김성월

어제 아쉬움만 주고 갔던 고래가 오늘 반드시 나타날지는 바다로 가 봐야 안다. 이정표와 미끼도 없이 우리는 오늘도 커다란 고래를 잡으러고 나섰다.

오늘은 물결이 어제보다 더 세찬 것 같다. 그래서 물빛도 더 진한 느낌이 든다.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자 어부들은 속도를 줄여야 한다며 닻을 내렸다. 파도에 배가 부딪히면서 부서진 물조각들이 찰랑거리며 발 밑으로 들어 왔다.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정말 손가락 두 마디 만큼만 더 흔들리면 물이 와락 들어 와 배가 가라 앉을 것만 같다. 온 몸이 움찔거려지고 얼마나 그런 시간이 계속되었을까? 배 안에는 물이 차 오르기 시작했고 그 중에 제일 깡마르고 농담 잘하던 아저씨가 녹슨 빈깡통을 가지고 부지런히 물을 퍼냈다.


산골 아이로 자란 나는, 해가 산너머로 뜨고 지는 것은 알아도 바다와 파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더군다나 넓은 바다에서 일엽편주 탄 것은 난생 처음이다. 배는 가끔 뒤집어질 듯 흔들렸다. 공복이라 멀미가 생기려 한다. 솔직히 무섭기도 하지만 스릴은 청룡열차 보다 더 좋았다.

한편으로 만약, 이 배가 뒤집어지면 어떻게 될까? 이곳은 통신 사정이 좋지 않으니 아마 일주일 후 아니면 2 주일 후 뉴스에 나오겠지. 

인도네시아 TV 프로그램 탐험가의 발자국(Jejak Petualang) 제작 팀이 우리처럼 오지 섬으로 취재 갔었다. 그런데 나룻배가 계곡의 강한 물결에 휩쓸려 일곱 명 모두….. 실종되었다가…... 결국…. 


        < 고래잡이 나갔다가 돌아 와 목선을 해변으로 끌어 올리는 장면>


이럴 때, 왜 이런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어제 밤 민박 집 아저씨가 고래 잡으려 사고가 나서 죽으면 그만이라고 했는데, 피디는 수영 할 줄 모른다고 한다. 나는 헤엄정도는 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을까지는 5km 가 넘는다. 마음은 살아야지 하면서 머리는 이미 죽을 준비부터 하고 있다. 한 두어 시간을 그렇게 난리 치더니만 바람도 지쳤는지 조용해졌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서 약간 기운 것을 보니 정오는 조금 지난 것 같다. 우리는 고래를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고래의 먹이가 될 뻔 했으니 오늘은 정말 바람 불어 위험한 날이었다.  긴장된 몸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경쾌한 파도의 리듬을 탔던지 해변에 도착하니 전신이 뻐근하고 쑤셔온다.


어린 아이들과 돼지들이 해변에서 검은 모래를 파 먹으면서 놀고 있었다.

오늘은 돼지 팔자가 참 부럽다. 양쪽 귀에 구멍을 뚫어 줄을 매어 놓은 것이 하도 재미있어 가방을 멘 채로 모래 위에 퍼 질러 앉았다. 될 수있는 대로 돼지 곁에 가까이 가서 앉았다.

아이들도 모래에 누워 놀고 있다. 나도 아이들처럼 모래위에 드러 누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들을 사진 찍고 숙소로 돌아 와 가방을 열었다. 잠금 장치가 자석으로 된 곳에 철가루가 소복하게 붙어 있었다. 아, 그래서 모래가 까만 색이었구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민박집 아저씨에게 라마레라 마을에 대하여 이야기 듣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극동 누사 ?가라(Nusa Tenggara) 플로레스섬에 위치한 라마레라 마을은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서 재래식 방법인 창으로 고래 잡이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마을이기에 유일하게 고래잡이가 허용된 마을이다. 마을 모든 어선은 23척이지만 평상시에 물고기를 잡을 때는 모터가 달린 배를 사용한다. 그러나 고래를 잡을 시 모터가 달린 배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첫날 고래를 만났을 때 사람들은 '이야~이야~' 하면서 노를 저어 고래를 ?아갔다.

라마레라 주민들은 약 1천 여명이다.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기에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못하며 마을의 규칙이 있는데 예를 들어 불륜을 저지르거나 남녀 간의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면 벌금이 있다. 작게는 1.500 ~ 5.000만 루피아(1500-5000$)까지 된다고 한다. 지불 능력이 안 될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패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책임 못질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래를 잡았을 경우에는 라마레라 마을에는 뚜안따나(Tuan(주인) Tanah(땅)가 있다. 뚜안따나는 라마레라 마을의 주인이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여겨지는 사람이다. 그 뚜안따나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이라고 했다. 머라삐 화산의 주루꾼지(juru Kunci) 마리잔 할아버지와 비슷하다.

뚜안따나는 고래가 잡혔을 경우 고래를 잘라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맞게 분배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가 분배해 주는 것이 불만을 품으면 안되며 자신이 받은 고기가 부위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사람과 바꾸면 다음에 바다로 나갔을 경우에 해를 입는다고 말했다.  

 


 고향처럼 정겨운 라마레라

 

라마레라 마을은 전기 사용 시간이 12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 까지만 전력을 공급 받는다. 전화선도 없고, 통신 사정이 좋지 않아 연락이 거의 두절 상태다. 그런데 마을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중계 탑이 가까워 핸드폰을 사용 할 수가 있다고 한다. 숙소에서 산꼭대기까지는 걸어서 이십 여분 걸린다고 했다.

 

며칠 동안 끊긴 연락을 위해 어스름한 초저녁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널찍한 운동장이다. 오르막이라 숨이 가빴던 것을 내몰아 �다. Signal 찾으려고 핸드폰 높이 쳐들고 좌로 우로 뛰어 다녔다. 드디어 연결이 되었다. 내 가족이 있는 집보다는 프로그램 제작사무실로 먼저 걸었다. ‘뚜 우~ ’하며 신호가 가더니 “여보세요…” 라고 말한다. 전화 통화를 생전 처음하는 것처럼 '여보세요'란 말이 이렇게도 신기하고 반가울까, 서로 연락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갑갑했던가,

사람들은 말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지만 나는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라 실종일 수도 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다. 전화 걸기 전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웠는지 귀뚜라미, 쓰르라미, 매미 소리가 귀에 들여 온다. 길에는 가지가 축 늘어진 고목들이 많았고  굽이 돌 때마다 툭 튀어 나온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조금 전 희미하던 어둠이 사방을 두껍게 에워쌌다. 굵은 자갈들이 깔린 밤길, 그 위에 낮의 피로함을 살짝 포개니 발걸음은 술 취한 사람 마냥 휘청거린다. ‘어,, 저게 뭘까?’ 반딧불이네!. 날아다니는 반딧불 참 오랫만이다. 반딧불 잡으려고 뛰어다니다가 평상 모서리에 부딪혀 울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별보며 먹던 삶은 옥수수가 먹고 싶다. 엄마도 보고 싶다. 엄마가, 엄마가….

 

 

 

아침은 이미 말했듯이 건빵보다 더 맛없는 비스켓으로 떼웠다. 점심은 배가 고프다고 물을 많이 마실 수가 없었다. 종일 바다 중안 목선을 타고 있어 화장실을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저녁 시간이다. 그들은 옥수수 섞은 밥이고 우리는 흰쌀밥이다. 라마레라는 화산지대라서 채소들이 귀하다. 반찬으로는 어쩌다 생선이 있고 매일 삼벌하고 싱콩잎 조금 뿐이다. 우리는 민박집에서 4일 동안 저녁만 그렇게 먹었다. 

 

오늘은 민박 집 아저씨 인터뷰 중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부들이 목선을 타고 고래를 잡다보면 목선이 고래의 힘에 끌려 국경을 넘어 호주바다까지 끌려 간 것을 호주 정부에서 비행기로 귀국시킨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길 들으니 나도 모르게 캐들캐들 웃음이 나왔다. 라마레라(Lamalera) 사람들은 부정한 짓을 저질러 놓고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 함께 탔거나, 고래를 잡은 것은 행운이지만 그 행운에 불운으로 겹치면 그렇게 된다고 말했다.  

 

라마레라 사람들의 인사성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만큼이나 밝다. 마을을 지나가다 열 사람을 만나면 열 사람 모두 인사를 건넸다. 가끔은 대화 도중이라 귀찮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먼저 말을 걸고 무엇을 물으면 그들은 꼭 돈주면 가르쳐 준다고 말해 마음이 많이 상했다. 인터뷰를 한 번해도 꼭 먼저 '돈 줄꺼냐?'고 물었고 날마다 타는 목선 비용을 우리는 지불했다. 또 고래가 잡힐 경우 좋은 그림을 촬영하기 때문에 적어도 300$ 이상은 자신들에게 지불을 하여야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에 일본인이 보름 동안 머물면서 낱낱이 계산하지 않아 몰매를 맞았다는 별로 듣고 싶지도 않는 이야길 은근히 하곤 했었다.

 

멀리서 바라 본 라마레라는 양철 지붕으로 지어진 집들은 언덕 위 돌산에 있고,  마을 앞은 바다 뜨거

운 햇볕 그리고 황무지 같은 땅이라 농사일은 힘 든다고

한다.

교통 수단은 트럭을 개조하여 버스로 이용 하였고 아직도 물물 교환이 활성화 되고 있는 시장에도 가 보았다. 예를 들면, 야채가 비싸기 때문에 옥수수 하나와 물고기 한

마리. 아니면 바나나 한 줄과 물고기 한 마리. 살아 있는

닭한 마리와 야채 두 소쿠리. 등등...

마을의 여인들은 모두 시리삐낭(siri pinang)을 복용하고 있어 입안아 붉은 색으로 가득했다. 왜 그걸 즐기느냐?'

는 내 물음에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지만 여자들은 이걸

즐긴다고 하며 분필하고 붉은 열매를 잎아 싸서 자기 입에 넣어 꾹꾹 씹더니 하나 만들어 나에게 권하기도 했다.

마을에는 모기가 많았다. 사람들은  말라리아에 대한 치료와 예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파파야(Papaya)잎을 고래 기름에 데쳐 먹으면 괜찮다고 요리해서 주는데 인터뮤 딴다며 PD가 자꾸 먹으라기에 먹어보니 고래는 질기고 파파야 잎은 쓴맛으로 입안 가득했다.

 

오늘은 밤 낚시 촬영 하기로 했다. 불빛 하나 없이 줄낚시를 하는데 바늘에 미끼를 달아 그저 느낌으로 낚아 올린다고 한다. 달빛이 빠진 밤바다에서 노를 저으니, 물속에서 하얀 물방울들이 마치 토란잎 위에 이슬방울 또르르 굴러다니는 것 같고 하얀 진주알처럼 영롱하다. 한참이 지나도 고기는 잡히지 않았다.  

배가 해변에 닿아서 내가 먼저 뛰어내리고 PD가 뒤따라 뛰어내리는데 파도가 훌쩍 덮쳤다. 카메라가 젖었다. 우리는 숙소에서 드라이로 오랫동안 카메라를 분해해서 말리는 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라마레라 마을 밤풍경은 불빛으로 뒤덮였다. 추억과 사랑의 불빛을 품고 있어 누구나가 와도 고향에 온 느낌이 들 것이다. 하늘에는 별과 달빛, 가족들의 사랑이 자라고 있는 지붕 아래로 새어 나온 화목의 불빛,  그리고 길에서 만나 동심을 찾아 준 추억의 반딧불.

  <물물 교환시장의 모습>

                  

              라마레라를 떠나 오면서/끝

 

사일동안 목선을 탔지만 이번에 마지막으로 목선을 타고 라랑뚜까로 가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탔는데 하늘이 붉게 물들어지는 지금까지 타고 있다.

인도네시아 살면서부터 노을만 보면 가슴이 먹먹했다. 이제는 잊어야지 하면서 가슴 속에 키워 온 커다란 그리움을 꺼내 바다로 던졌다. 낯선 바다에 던져야 그리움이 길을 잃어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그리움이 던져진 바다는 노을이 슬프게 번지고 있었다.

한밤중에 도착 한 라랑뚜까, 마땅한 숙소는 없고 또 신부 부모님 집에서 하루를 신세졌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오른팔이 무겁다. 붉은 자국이 여러 군데 나있고 퉁퉁 부어 열도 난다. 살짝 긁으니 미칠 듯이 가렵다. 잠결에 가려운 것을 느꼈지만, 너무 고단했던 탓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홑이불만 뒤집어썼는데 다. 나는 그 집 딸과 함께 잤는데 나만 잔뜩 물렸다

 

모기로부터 PD는 멀쩡하다. 그런데 PD는 어깨가 아프다고 말했다. 어제 목선을 타고 오는 도중 밤이 되었고 목선의 엔진 소리가 뿌우욱~ 하더니 갑자기 멈췄다.  알고 보니 어느 마을 지나다가 마을 앞바다 작은 배들을 묶어 놓은 끈에 우리가 탄 목선 엔진이 걸렸던 것이다. 우리는 엔진을 고친다고 잠시 머물자 젊은이들은 우리를 도둑으로 오해하고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고장 난 엔진을 고친다고 정신이 없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큰 배를 몰고 와 우리가 탄 목선을 빙빙 몰면서 쿡쿡 박았다. 한 번씩 박힐 때마다 목선은 뒤집어질 듯이 흔들렸다. 눈을 떠도 감음 것처럼 어두운 바다. 사방을 분간 할 수 없어 무서웠다. 잠시 조용하더니 ‘아~’ 하는 소리가 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투닥닥 났다. 목선 앞머리에 앉아 있던 PD가 그들이 던진 쇠파이프에 어깨를 맞았던 것이다.

 

이 늪지대 같은 플로레스 섬을 드디어 오늘은 떠날 것이다. 안개가 스멀스멀 날아다니는 이른 새벽이다. 조급한 마음에 일찍 출발하였더니, 마우메레 공항에는 아직 몇 사람만 나와 있다. 조금 후 하나 둘씩 모여들더니 작은 공항에 갑자기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이유를 물으니 5일 전(우리 오던 날 숨바 섬에 고장 난 비행기) 발리 행 비행기 한대가 결항 했는데, 그 때 탑승 못한 승객 100여명을 매일 20명씩 나눠 탑승시키는 중이라며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어제 열 네 명이 탑승했고 자신은 티켓이 있어도 못 탔는데 오늘은 20명 정도 탑승 할 거라며 자신의 일을 남의 이야기 하듯 한다. 항공사 직원이 오늘 탑승자 명단을 불렀다. 보딩패스를 나눠주며 오늘 탑승자는 25명뿐이라고 외치자 웅성거림과 함께 26번째 아주머니가 안경 밑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어제도 출발을 못해 오늘은 꼭 가야 한다며.

 

오늘 이런 상황이라면 내일 출발 또한 보장이 안 된다. 뾰족한 방법을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남여 두 사람을 붙잡고 제의를 했다. 함께 숙소로 가서 티켓을 구하고 출발 방법을 찾는 것이 어떻겠냐? 며. 그 둘은 공무원인데 출장 가는 길이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이제 우리는 함께 티켓 구하러 갔다. 항공 직원에게 ‘무조건’ 내일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담배 값을 바라며 그들은 티켓을 우리 숙소 배달까지 해 주었다. 티켓을 손에 거머쥔 이상 비행기는 무조건 탈 수 있다.

곱슬머리 여자는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 얼굴에는 함박꽃이 피고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모르니 비행기 좌석에 앉거든 그 때 하자며 미뤘다. 

이다. 사실 나는 모기 물려 퉁퉁 부은 팔뚝을 보며 말라리아는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직까지 멀쩡한 것을 보면 그 모기가 말라리아가 아니던지 아니면 라마레라에서 고래 기름에 데쳐 먹은 파파야 잎이 효과가 있었는지 둘 중에 하나일 것 같다.


나시고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나오는데 문 앞에 거울이 보인다. 모처럼만에 여자로 돌아 와 거울 앞에 서 본다. 팔과 손등은 피부는 이미 식빵 껍질처럼 가무잡잡하고 얼굴 여기저기에 기미가 그려져 있어 속상하다. 문득 탐험이고 체험이고 여자이고 싶어진다.

 

플로레스 섬!

라마레라 다시는 안 가고 싶으면서 죽기 전에는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질 것 같다. 고생스럽게 겪은 일들이 나에게 살아있는 교훈이길 바란다.

라마레라 마을이여, 플로레스 섬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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