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치 [현대수필]
최원현
지하도 입구에서 사주(四柱)를 봐주는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젊은 여자 둘이 진지하게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부러 걸음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아듣긴 어려웠고 다만 그 사주쟁이 아저씨가 거의 호통조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두 여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 싶었습니다.
그곳을 지나치고 나서도 내내 그들의 대화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다른 때 그 앞을 지날 때는 손님이 없어서인지 그렇게 기운 없어 보였는데 앞에 손님을 두고 나니 저토록 당당해 지는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의아해집니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하물며 어떻게 남의 운명까지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남의 운명을 알아낼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 자신의 운명 또한 어느 정도는 내다 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다가오는 자신의 미래 앞에서 또 어떤 자세로 기다릴까요.
정녕 그가 운명을 내다 볼 수 있다면 몇 푼의 돈을 위해 이런 자리에 앉아있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 그 앞에 앉는 사람들도 하도 답답한 심정이라 무슨 말이건 그저 한 마디 듣고싶어서가 아녔을까요.
고종사촌 동생이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술을 해도, 안 해도 생명의 길이는 별 차이가 없다는 의사의 선고에도 가족들은 상당기간을 본인에게 알려주지 못하고 숨겨오다가 겨우 기회를 만들어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어차피 투병이란 환자 자신의 의지가 가장 큰 관건인 것이고, 또 자신의 생명에 대한 비밀을 남은 다 아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는 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내 설득도 있어서 동생은 몹시 비가 내리는 날 제 남편에 의해 서울 외곽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헌데 참으로 어렵게 꺼낸 제 남편의 말을 듣고서 처음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동생은 생각보다 의연하게 사실을 인정했고, 그날 둘이서는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으려는 듯 실컷 울고 왔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동생은 자신 앞에 다가와 있는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하면 자식들과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애써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갚을 기회를 가질까 하며 강한 의욕까지 보였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는 청소년수련원에 갔던 유치원 아이들이 화재로 23명이나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처럼 목숨을 잃고 말았답니다. 아빠 다녀올게요, 보고 싶으면 사진보고 기다려요 하며 떠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날아온 소식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소리만큼이나 엄청난 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엉겁결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에 비하면 자신에게 남아있는 목숨의 길이를 셈하면서 눈물 속에서 마지막 타 들어가는 자신의 생명의 촛불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긴 해도 그렇게라도 자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남은 시간에 대해서도 보다 요긴하게 활용코자 노력하는 동생은 어쩌면 덜 억울할 성싶기도 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네 개의 'C'로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곧 Carat(캐럿;크기)과 Cut(컷;모양)과 Color(컬러;색깔) 그리고 Clarity(클래리티;순결)라는 이 네 개의 'C'가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람들은 제대로 기준다운 기준도 없이 저마다의 잣대로 상대를 재며 너무도 쉽고 편하게 판단하고 규정하고 판결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동생은 의학적으로 남아있는 목숨의 길이가 계산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더더욱 기가 찰 노릇입니다. 내가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더욱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명멸하는 자신의 생명의 촛불을 바라보는 심정을 무엇에다 비길 수 있겠습니까.
평생동안 쌓아온 자신의 지위, 모아놓은 재산도 결코 자신의 생명을 회복하고 연장시켜 주는 일엔 아무런 힘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네 개의 'C'로 결정된다지만 사람의 가치는 목숨이 붙어 있느냐 없느냐 한 가지로 결정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한 성서의 말씀이 새롭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이번 생일 때는 모처럼 모든 형제들을 다 모아 생일 상을 차리고 싶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생일을 맞게될 지 알 수 없다며 그렇게 하겠노라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고 의연한 동생이 고마우면서도 무서워지기도 하고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동생의 어머니인 내 고모님도 지금 동생의 나이 때 돌아가셨습니다. 동생도 그 사실을 아는지라 자신의 죽음마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사람의 가치는 생명이 아닌 죽음 앞에서 가장 정확하게 나타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동생처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어집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과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까지 정리한 동생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그런 그이고 보면 뒤돌아보아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삶을 살아왔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다 제 운명은 모르면서 남의 운명을 알려 주겠다고 자리를 펴고 앉아있는 사주쟁이 같은 몸짓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은 아닐까요? 그래서 정작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이 되면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으로 가장 추한 모습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겐 새로운 세상에의 희망과 기대로 죽음을 정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삶은 내게 허락된 최고의 선물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늘 불만입니다.
새삼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있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내게 이 땅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동생의 몫까지도 내가 해야될 일일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날 동안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에 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야 그저 내 할 수 있는 한 우직하리만큼 충직스럽게 맡겨진 내 일을 하는 것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