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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모집/늘샘최원현수필

하얀 고무신

이부김 2008. 10. 8.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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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고무신


    최원현


    우리 집 현관에는 흰 고무신이 한 켤레 놓여있다. 한 3년 되었을까, 아내가
    어디서인지

    다듬잇돌을 가져다 현관에 놓았다. 그런 얼마 후 재래시장엘 가서 흰 고무신을 사자고

    했다. 오랜만에 고무신을 신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이기는 척 따라가 고무신

    한 켤레를 샀다. 삭막한 아파트의 공간이지만 다듬잇돌이 댓돌처럼 놓여진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지자 금방 집안 분위기가 달라져 보인다.



    고무신을 보면 성큼 어린 날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진다. 눈부시도록 하얗게 닦여

    댓돌 위에 정갈한 모습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던 할아버지의 하얀 고무신과 내가

    신었던 검정 고무신은 생각만 해도 묘한 색상의 대비를 이루며 삶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산에 나무라도 하러 간 날엔 어쩌면 그리도

    잘 찢어지던지 장날만 되면 어김없이 그 고무신을 들고 신기료 아저씨를 찾아가

    꿰매고 붙이고 하던 기억이 새롭다.
    찢어진 부분에 못 쓰게 된 다른 고무신의 한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어 대고는 그걸 열

    받은 기계의 눌림판에 놓고 지그시 눌러댄다. 그리고는 손으로 물을 움켜 그곳에

    뿌리면 피시시시 뜨거워 못 견디겠다는 소리를 내며 하얀 김을 뿜어낸다. 그리고

    눌렀던 판을 풀면 찢어진 부분엔 남의 살이 두툼하게 붙어 때워지는 것이었다. 그런

    수없는 덧붙임과 꿰맴의 반복 속에 고무신의 수명이 연장되어 갔다.

    그러나 그 때의 그런 꿰맴과 붙임은 별로 흉이 되거나 궁색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랬고, 의당 그러려니 했기 때문이다. 낡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며, 오래

    쓰려는 마음, 아끼는 마음이며, 무엇이든 귀히 여기는 마음이었다.
    고무신을 보면 그래서 새것 보다는 낡은 것, 헌 것, 옛것이 더 먼저 생각난다. 그것은

    잊고 싶은 기억들이 아니라 추억거리로 가끔씩이라도 꺼내보고 싶어지는, 새록새록

    살아나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기억들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은 새것이 아니라 손때 묻고 정이 든 옛 것 낡은 것들이다.

    그러나 가는 세월 앞에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던 말도 이젠 옛말일 뿐 세상이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렸다.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엇이 정작 소중하고 아끼고

    싶은 것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것들, 이제

    고무신은 최소한 50년의 삶은 살았던 사람들에게나 추억이 될만한 것이 되었다.

    어쩌다 그런 옛날, 그런 그리움에 겨워 오랜 세월의 흔적을 찾아 나설 때가 있다.

    그러나 1년도 안되어 찾아가 본 곳에서도 헛걸음을 치는 판이라 실망만 안고 되돌아

    오는 것은 오히려 흔하디흔한 경험일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 집 현관의 하얀 고무신

    한 켤레는 그런 내 마음을 고향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도 되고, 그리운 옛 날의 한 때,

    그리운 고향의 한 부분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에서 찾아지는 것들인가 보다. 별 것도

    아닐 것 같은 하얀 고무신 한 켤레로 하여 나는 오랜만에 고향과 어린 날과 잊혀져 간

    추억들을 챙겨보게 되었다. 하얀 고무신 한 켤레로 오늘 나는 그리움과 행복에 흠뻑

    취한다. 그렇고 보니 아내는 하얀 고무신이란 열쇠로 내 시간여행의 문을 열어준

    셈이다. 흰 고무신을 신자 하얀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드신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여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최원현 수필문학가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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