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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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모집/늘샘최원현수필

아들의 그림자 [현대수필]

이부김 2008. 9. 1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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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그림자 [현대수필]
 
                                  글/ 최원현

 

작은아이와 산엘 올랐다. 해발 364m이니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았던 덕택인지 훼손됨이 없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산이었다.
절이 있는 중턱까지 차로 가서 그곳으로부터만 오르는데도 오랜만의 가파른 산행은 꽤나 힘이 든다. 길 양쪽으론 산 도라지들이 청색 초롱을 켜들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반기고 있고,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있는 숲 속에선 이따금 산새들이 인기척에 놀라 푸드덕 푸드덕 날아오르는 것을 보니 갇혀있던 곳을 벗어난 듯한 시원함과 홀가분함에 힘든 것도 더운 것도 저 멀리로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았다.

아들녀석은 '너 혼자 씽씽 올라가 보라'고 했더니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그런데 녀석과 내가 이렇게 같은 길을 가고 있음에도 무언가 크게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은 씩씩하게 잘도 오르는데 나는 금방 다리가 뻣뻣해 지고 숨이 차고 땀이 비오듯 흐르는 것이요, 나는 금방 지쳐 버리는데도 녀석은 그냥 쉬엄쉬엄 가는 것처럼 땀도 나지 않고 잘도 오른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나이에서 비롯되는 체력의 차이인가 보다. 그런데다 아이는 오직 오르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데 나는 오히려 좌우에 펼쳐져 있는 자연경관과 풀과 나무와 꽃과 발 뿌리에 채이는 돌멩이 모양 하나까지에도 마음과 눈을 빼앗기다 보니 자연 더 걸음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수북이 쌓인 솔가리를 보면서는 어린 날 갈퀴를 들고 땔나무를 하러 온 산을 누비던 기억이 새롭고, 지천으로 널려있는 마른 나ant가지들을 보면 늘 땔감 걱정을 하시던 외할머니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몰래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봄이면 분홍색으로 온통 산을 물들였을 진달래며, 바람이 일 때마다 솔솔 풍겨 났을 상큼한 송화 내음이며, 밤새 이슬을 모았다가 아침 햇살이 찾아오면 또로록 이슬구슬을 굴려 보내곤 했을 도토리 나무의 너른 잎이며, 산에는 어린 날의 동화와 잊혀져 버렸던 옛 기억들까지를 아름다운 동심의 나라로 추억케 해 주었다.

아이는 여전히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문득 저것이 저들의 사는 방법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시대가 이만큼 바뀌었는데 어찌 사는 방법, 목표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옛날대로 일 수 있으랴. 어쩌면 달라진 시대에선 너희들 방식대가 훨씬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할 지도 모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전성기인 너희의 힘, 그 젊음의 능력은 넉히 그러고도 남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빠와 같은 기성세대가 조금 느리고 더디다고는 해도 보다 정확할 수 있고, 그곳까지 이르는데 따른 과정 속에서도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음은 인생을 훨씬 더 많이 살아온 인생 스승이요 선배의 소중한 경륜임을 잊지 말아야 할게다.
324m의 정상에 오르니 서해 쪽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영인산의 나무와 풀과 꽃의 내음을 함께 몰아와 상쾌함을 더해 준다.

바라보이는 평택, 온양, 도고, 천안이 가까이로 다가오는 듯 하고, 내려가는 표시는 수암사 4.0km, 용샘 500m, 영인면 소재지 2.8km를 안내하고 있었다. 작은 이정표
하나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갈 방향을 잘도 알려주고 있었다.
정상에 먼저 도착했던 아이가 기념이라며 꽃 한 송이를 꺾어왔다. 우리 나라 산에만 있다는 야생화 패랭이꽃이었다. 가녀린 몸통줄기에 빨갛게 핀 꽃은 조선시대 여인의 모습 마냥 가녀린 듯 한데 어떻게 저 드센 바람도 견뎌내었을까 생각하니 뭔가 알 수 없는 아픔 같은 것이 바닷물처럼 싸아하니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아이가 준 꽃을 손에 들고 파아란 하늘에 그 꽃을 들어올리니 정물화 한 폭이 순식간에 그려진다. 꽃 모습이 아닌게 아니라 패랭이 모양 같다. 한국미가 물씬 풍기는 패랭이꽃을 손에 들고 내려갈 방향을 찾는 내게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목덜미를 휘감는다.
사실 차로 다닐 때는 생각 없이 길만 따라 다니다 보니 퍽 먼 거리인 것 같았고, 또 이웃해 있는 지역조차 쉽게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산 위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니 인접해 있는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 그리고 그것들을 이어주고 있는 길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와 한껏 감회가 새로웠다.
차를 세워놓고 왔으니 어쩔 수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파른 길은 오르기 보다 내려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어쩌면 사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그저 오를 때는 정신없이 오르기만 할 뿐 이지만 어느 정도 이뤄놓을 것 이뤄놓은 상태에선 내리막일 수밖에 없고, 그 내리막길에서 사람은 오히려 사람값을 나타내게 되는 것일 테니 자신뿐 아니라 그야말로 전후 좌우에까지 훨씬 조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오르막은 펼치는 것이지만 내리막은 거둠이요 정리가 아니겠는가. 인색하지도 교만하지도 않게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으랴.

저 아래로 우리가 올라왔던 찻길이 광목 여러 필을 길게 펼쳐 놓은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숲 그늘 속에서 맡는 솔 향기며 풀 냄새는 참으로 싱그럽기가 그지없다.

내려오는 길에 세심사(洗心寺)에 들렀다. 크진 않았지만 아늑한 산의 품에 안겨 참으로 안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절 이름이 정감스럽다. 마음을 정갈하게 닦고 씻는 것 보다 더 정성스런 다듬음과 다스림이 어디 있으랴. 비구니 스님들만 있는 절인가 보다.
돌 틈으로 솟아오른 샘물을 바가지 가득 퍼서 들이키고 스님께 절에 대해서 물었더니 세심사는 신라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조선시대에 중축을 했다 한다. 절 앞마당에 지방 중요문화재라고 하는 석탑도 하나 있는데 내게는 오히려 그 뒤쪽 범종각에 있는 동종(銅鐘)이 절의 운치를 한껏 더해주는 것 같아 보였다. 스님이 세 번 타종을 했다. 은은한 울림이 산을 돌고 돌아 아아라이 잦아들었다.
왜 종을 치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시계를 보니 12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짐작컨데 부처님께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사이)에 한 번만 드린다는 사시마지(巳時麻旨) 공양을 우리 점심시간에 맞춰 드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불가에선 여러 가지 의미로 때맞춰 법고(法鼓)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을 사용한다 하니 저 타종에도 단순한 점심공양 이상의 무슨 뜻이 있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오고 감들이 불가에선 윤회(輪回)라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안타까움을 어찌 하겠는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고추잠자리 몇 마리가 눈앞을 어지럽힌다. 조금은 빠르다 싶지만 우리를 반기는 모습들 같아 그 유유자적함에 한껏 마음까지 편안해 진다.
접어 두고 떠나온 일상의 두터운 일거리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자연과 벗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결코 작지 않은 축복이 아니랴.
내려왔던 산을 올려다보니 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곧고 높다랗게 잘 자란 산 나무들의 끝만 보이는데 내려가야 할 길을 바라보니 아스라하여 잠시 쉬어 가자고 했더니 아이는 그 새도 무료한 듯 돌멩이질을 해댄다.
아직 어린아이로만 여겼었는데 힘 안들이고 산을 오르던 모습이나 지금 등 보이고 있는 뒷모습이 나보다 작지는 않아 보여 짐짓 세월이 흘렀음을 느끼게 한다.

아이 곁으로 다가가 나도 돌멩이 하나를 집어 녀석을 따라 돌 맞추기를 해 본다. 산 그리매가 아이와 나의 등을 살포시 감싸듯 덮어오는 것 같다.

문득 바쁘다는 핑계만으로 녀석과 너무 같이 해 주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가만히 녀석의 등을 감싸 안아본다. 어느덧 아이의 키는 나보다도 훨씬 더 커 있었다. 아이의 그림자가 내 것보다 분명 한 뼘이나 더 커져 있었다.
<1997. 예술세계 '97. 12월호>    최원현 수필문학가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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