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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 묘비에 세 번이나 찾아가다

이부김 2019. 1. 14.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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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 묘비에 세 번이나 찾아가다

 

 

 

               양칠성묘지 앞에 헌화하고 있는 우쯔미아이꼬교수

제가 알기로 그 묘비는 가룻(garut)영웅묘지에 있다고 들었어요.”

인터넷에 자카르타시내 깔리바따(kalibata)국립묘지에 있다고 적혀 있네요.”

그건 잘못된 정본데, 그러면 피디님 제가 그 두 곳 모두 사전답사 다녀올게요.”

선생님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피디와 서로 엇갈린 의견의 전화통화는 그렇게 끝났고, 20148월 어느 날 아침 나는 집을 나섰다.

서울에 사는 김서방찾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묘비를 찾아 국립묘지로 간다. 자카르타 시내 위치한 깔리바따국립묘지는 우리 집에서 가깝지만, 가룻군영웅묘지는 시골이라 자동차로 왕복 10시간은 걸리는 아주 먼 거리다.

 

 

 

초등학교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꽃상여 말고는 오십

대 중반인 지금까지 실제로 장례를 본 적도 장례식장에 가 본적도 없다. 외국에서 살면서 어쩌다 부모님 장례식도 놓쳐버리고 산소에 찾아 가 파릇파릇하게 자란 잔디를 쥐어뜯으며 눈물콧물이 범벅되도록 울었던 나.

그런 내가 난생처음 묘비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국립묘지로 들어섰을 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그 무엇이 나에게로 엄습하듯이 몰려왔다.

내 재주로는 도저히 묘비를 찾을 수 없어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이름은 3개다. 한국인 양칠성(梁七星)’ 일본인 야나까와 시치세이인도네시아인 꼬마루딘(komarudin)’ 피디가 말하던 깔리바따엔 그의 묘비가 없었다.

다음날 내가 있다고 하던 가룻영웅묘지로 갔다. 그곳 묘비 중에 한글과 영문으로 양칠성 대한민국, Komarudin, KOREA’ 라고 적혀 있었다. 남의나라에서 한글로 적힌 묘비를 보는데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작년에 고인이 된 극작가 권태하, 살아생전 나에게 양칠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1981년 인도네시아로 출장 갔다가 시내서점에서 일본인 우쯔미아이꼬교수가 쓴 책 <적도 아래서 조선인 항거하다> 읽고 양칠성 국적 되찾아주기 앞장섰고 망우리에서 양칠성 묘비까지 만들어 가룻으로 가져 간 분이다. 권태하작가는 우리 가족과도 각별한 사이였고 나를 만나러 말랑에 오셨던 날 취재 때문에 공항까지 배웅 해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 아팠는데 갑자기 코끝이 찡해 왔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돌아오면서 흔들리는 자동차 창문을 열고 어떤 미친놈이 직접 가 보지도 않고 근거 없이 제멋대로 인터넷에 적어놓았단 말인가라며 쓴 독백했다.

 

 

 

촬영일이 다가왔고 KBS 제작진들이 도착했다. 다음 날은 일본에서 우쯔미아이꼬교수기 도착했다.

그의 책<적도 아래서 조선인 항거하다>에는 빵에란 빠빡 민병부대원이었던 한 사람이 1975년 장군으로 승진하여 자신과 함께 독립 운동하다가 네덜란드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한 3명 구일본군 출신을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서하고 공동묘지에 묻힌 그들을 독립영웅묘지에 이장해 달라는 탄원서 제출하고 그들 3명 중 한 명 야나까와 시치세이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다. 등의 내용이다. 그 조선인이 바로 전북 완주 출신인 양칠성이다.

 

 

                                         KBS 제작진  나원식PD, 백홍종촬영감독

양칠성은 27세 때 1942년 일제의 징용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치마히 포로수용소에서 연합국포로를 감시하는 포로감시원 근무했다. 19458, 일제의 패망으로 태평양전쟁이 종결됐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내와 자

식을 두고 살다가 다시 지배하려고 몰려 온 네덜란드군인에 의해 전범으로 총살 된 것이다.

우쯔미아이꼬교수가 일본인 군속이었던 조선인 양칠성 묘비 앞에 미리 준비해 간 꽃다발을 헌화했다. 한참동안 묵념하고 있는 그녀 뒷모습에 궁금증이 생겨 지금 어떤 마음이세요?”

야나까와 시치세이(양칠성) 국적을 제대로 밝혀 줄 수 있어서 기뻐요

사실 제작진은 일본인 우쯔미아이꼬씨와 인터뷰가 고민이었다. 일본어를 인도네시아어로 인도네시아어를 다시 한국어로 통역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으로 와전 될 수도 있기에 일본어 잘하는 인도네시아인 통역사를 데리고 갔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교환교수를 지낸 적 있는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인도네시아어가 유창하여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반둥의 호텔레스토랑에서 우쯔미아이꼬교수가 말했다.

일본사람인 내가 한국 사람들과 인도네시아에서 함께 식사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것도 일본 전쟁에 관해 인도네시아 말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고 4년이 흘렀다. 20188월에 나는 MBC 제작진들과 함께 세 번째 양칠성 묘비로 찾아갔다. 이번에 동행자는 일본사람이 아니라, 재일교포 4세이자 위안부영화 귀향의 주인공인 강하나 씨였다. 우쯔미아이꼬교수 때처럼 꽃다발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꽃잎을 한 바구니 가득 준비했다. 강하나 씨의 손에서 한 잎 두 잎 꽃잎들이 묘비 앞에 뿌려질 때 나는 양칠성은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제작진은 인도네시아대학교(University Indonesia)로 찾아 가 양칠성에 관해 연구한 로스띠너교수도 만났다. 양칠성은 잠시 이슬람교를 믿었으며 꼬마루딘이름은 아랍어로 달()을 상징하며 친절하고 용기 있는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라는 희망적인 의미의 이름이라 말했다.

인도네시아 역사커뮤니티 세미나에도 참석해 봤다. 토론의 핵심은 양칠성이었지만 역사적인 독립전쟁의 보편적인 이야기와 앞으로 양칠성 동상과 학교 설립도 계획 중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내가 생각한 인간적인 답은 듣지 못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연구하는 자들이 만나지도 않고 어떻게 죽은 자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양칠성 가족들은 인도네시아 국내언론들과 만남은 일절 거부한다고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을 섭외하려고 열 번의 전화를 했다. 그들은 아홉 번 전화할 때까지 한마디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저 나중에 연락해 주겠다며 대답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파묻혀 이십년 생활한 나는 그들을 잘 안다.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 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문화이자 습성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말아야지 하며 전화했을 때 그들은 나에게 주소를 알려주며 집으로 오라고 했다. 현재 양칠성 가족으로는 현재 며느리(핫산)와 손자 둘과 증손자들이 있다.

혼자 된 며느리는 재혼하여 살고 있었다.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보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아팠다. 남편 에디(양칠성의 아들)씨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가슴 속 깊숙이 숨겨 놓은 이야기를 꺼냈다.

열세 살 때까지는 아버지(양칠성)가 일본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 아빠는 한국인이다.’ 한마디만 해 주었는데 왜 그렇게 하였는지는 남편도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하며 눈을 깜빡이는데 눈물을 주르르 흘러내렸다. 손자들은 양칠성이 할아버지라서 아주 자랑스럽고 한국을 인도네시아와 같은 조국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양칠성은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오히려 반문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 이곳이 바로 그분에게는 조국이 아니었을까요?”

 

                     2018년 12월 한국수필 12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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