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좋아하는 닭
김성월
땅속에 파이프를 넣어 원유를 퍼 올리는 곳이 있다. 사람들은 그걸‘미냑 수무르(원유 우물)’이라 말했다. 원유 우물이 있는 이곳 나는 몇 년 전에도 왔었다. 그때는 우기였다. 비 내리고 바람이 불어 기름방울들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바람에 미끄러워 자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뜨겁지 않았다. 건기라서 그런지, 산꼭대기에 서 있는데 내리꽂히는 적도의 태양빛은 내 정수리에 침을 맞는 것처럼 따끔따끔하다. 땀방울은 등줄기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체감으로 느껴지는 더위는 갈증에 혀가 꼬이는 듯하고 입안은 더 이상 삼킬 침마저 말라버렸다.
물을 마실까, 해서 도로가의 구멍가게로 들어섰다. 가게는 허름한 창고 같았으나 그 안에 생수병들이 보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모른다. 생수병을 열어 꿀꺽꿀꺽 두 세모 금 연거푸 마셨다. 남은 생수병을 들고 나오는데 들어갈 때 안 보이던 여자 꼬마가 무척 심심하다는 듯이 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
시골 꼬마들을 보면, 나는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산골 아이였던 나를 그 아이에게 접목시키면서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본다. 옷차림이 꼬질꼬질하였지만 귀여워, 나는 끼고 있던 팔찌를 풀어서 꼬마에게 끼워줬다. 그리곤‘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그리고 왜 여기에 앉아 있고, 누굴 기다리는지’취재하듯이 하나씩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장수처럼 막대기에 양동이를 매달고 아저씨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우리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양동이에서는 검은 물(물과 섞인 원유)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꼬마의 아빠였다. 낯선 여자가 자신의 딸과 이야기를 나누자 궁금해서 와 본 것이다. 꼬마가 팔을 쭉 내밀어 선물 받은 팔찌를 보여주자,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 꼬마는 네 번째 아이고 집에 세 명의 동생들이 더 있다고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그날 촬영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그 꼬마도 내 일상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후, 나는 또 그 원유 우물에 취재하러 갔다. 아기를 안고 있던 아주머니가‘나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예전에 팔찌를 선물 받은 꼬마의 엄마이고 지금 품에 안긴 아기는 꼬마의 동생인데 아홉 번째 막내’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삼년 전 남편처럼 말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침묵하자‘자신의 말을 못 믿겠으면 집에 가서 아이들을 세어 보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가 나를 데리고 갔는지 내가 앞장서서 갔는지 나는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꼭대기의 원유 채취 현장에 보이는 집이라곤 텐트 같은 판잣집 한 채가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지붕에 이 집은 가난한 집’이라고 굵직하게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마당에는 반팔 입은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이름은 아주 길다. 본명을 줄여 예명으로 부르는데 그 가족들은 예명보다 번호로 부르고 아이들 스스로도 자기가 몇 번이라고 이름처럼 나에게 소개 했다. 팔다리에는 피부병인지 넘어진 상처인지 덕지덕지 나 있어 보기만 해도 가렵고 긁고 싶어 보였다. 어떤 아이는 연고 한 통을 다 발라도 모자랄 만큼 상처가 덧나 흉터로 아물고 있었다. 일곱 번째가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자 팔꿈치에서 피가 났고, 여덟 번째는 오토바이 연통에 종아리를 데었다며 징징거렸고 파리들이 날아와 상처의 진물을 빨아먹고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었다. 탁자는 부엌 바닥이고 밥과 라면뿐이다. 아이들은 서로 제 몫을 많이 챙기려고 난리들이다. 닭 두 마리가 부엌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밥그릇의 라면을 물고 달아나다가 아빠에게 붙잡혀 라면을 빼앗겼다,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걸 나는 애써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는 닭한테 뺏은 라면을 일곱 번째 꼬마 그릇에 담아 주니 좋아서 환하게 웃었다.
꼬마의 아빠는 스무 살, 엄마는 열여섯 살 나이에 결혼하여 십 이년 동안 딸 여섯 명 쌍둥이 포함 아들 세 명 모두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꼬마의 엄마는 ‘피임하는 게 두려워’ 아이를 많이 낳았는데 이제는 그만 낳을 계획이라고 한다. 언뜻 생각났다. 나와 동갑이었던 발리에 사는 아주머니는 24년 동안 ‘스물한 명 출산으로 인도네시아 다산왕’ 기록자다. 피임하는 게 두려워 임신하는 대로 낳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사고가 다르겠지만, 오지의 가난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며 그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인데‘돈이 없으면 육체가 불편할 뿐 삶이 그리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꼬마의 아빠는 이주민이기에 원유우물이 없다. 남들이 정체한 후 도랑으로 흘러버리는 폐수에서 원유를 얻는 작업인데, 추수 후 들판에 가서 이삭줍기하는 일과 같다. 다산가정이라고 정부로부터 특별히 받는 건 없고, 다만 영세민이기에 한 달에 쌀 2kg씩을 받으니 열한 명이 생활하기에 쪼들릴 수밖에.
촬영 마지막 날 그들에게 전해 줄 계란 한 판과 학용품 과자를 사 갔다. 내 배낭에 달고 다니던 곰돌이인형은 일곱 번째 꼬마에게 주었다. 그 아이가 넘어져 울기도 했지만, 제일 애교가 많고 노래도 부르고 사랑스러워.
나는 선심 쓰듯 몇 가지를 전해주고 그들에서 선심 쓰듯이 가족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후로는 아직 그곳에 간 적이 없어 가족사진을 아직도 못 전해준 것 같다.‘남의 사진은 잘 찍는 것보다 잘 전해 주는 게 중요한데’내가 아직 실천을 못한 것 같다.
허름한 판잣집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아이들치곤 해맑은 웃음과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나는 ‘인도네시아 흥부전’을 퇴고하는 마음으로 그 원유 채취 현장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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