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포와 첫사랑
인도네시아 살면서부터 친인척이 아닌 여러 부류의 수많은 손님(제작진)을 만나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프로그램이 다르니 당연히 촬영현장이 다르다. 설령 같은 곳이라 해도 아이템이 다르기 때문에 늘 새로운 여행길이다. 거의가 초면이지만 공항에서 만났을 때 낯설지가 않고 예전에 알던 사람들처럼 반갑다. 아마 서로 추구하고 바라보는 방향이 같기 때문일 거라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도네시아 오면 이곳의 사람들과 문화를 신기해하면서 일정동안 서로 얼굴 찡그리는 일 없어 즐겁게 스케줄 마치고 귀국한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 깊이 반가움이 우러나온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출발 며칠 전 전화로 물어오는 배려 깊은 PD들도 있다.
“뭐 필요한 것 있어요? 사다 드릴게요.”
그 말을 들으면 나는 기분이 너무 좋다. 맘속으로 ‘필요한거야 많죠.’ 하지만 내가 짐 들고 다니기 싫은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하는 생각이 앞서기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 아뇨, 필요한 것 없어요. 조심해서 오세요.”
그래도 며칠 있다가 한 번 더 물어오면 나는 서슴없이 필요한 것으로 대답한다.
“ 주유소 가면 요즘도 장갑 주나요. 그런 장갑 두 켤레만 갖다 주세요,”
그렇게 말했더니 강해숙PD는 혼주용 장갑 스물 켤레를 갖다 주었다. 몇 년이 흘러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썬크림도 갖다 주는 사람도 있다. 엊그저께는 신호균PD가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다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로 받아 넘겼다. 그런데 다음 날 또 그런 이야길 해서 나는 생각 보았다. 여기서 구할 수 없고 가져오기 편하고 나에게 중요한 그게 뭘까, 골똘히 생각한 후 나는 말했다.
“쥐포 몇 장 갖다 주세요. 여기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며칠 후 신호균 PD가 도착했다. 봉지를 열고 쥐포를 보는데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쥐포를 들고 가만히 보고 있는 나에게 아들이 물었다.
“ 엄마 쥐포에 뭐가 묻었나, 왜 그렇게 보는데?”
“ 응, 그냥.......”
고국에서야 흔하디흔한 이 작은 쥐포. 그러나 여기에서는 상당히 귀하다.
연탄불에 굽던 쥐포를 지금은 가스 불에 굽지만 옛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게 나는 잠시나마 행복하다. 혼자만이 느끼는 이 감동과 감회, 아, 이 쥐포 한 장이 흘러간 세월을 거슬러 나를 추억의 공간으로 안내하고 있다.
나의 고향집은 사곡면소재지에서도 십리 길을 가야하는 저수지 안의 작은 산골이다. 마을에서 직행버스를 타려면 이웃마을까지 1km는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버스가 안 다니는 촌동네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면소재지까지 걸어 다녔다. 책을 싼 보따리를 허리춤에 차고 신작로를 뛰다보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고마운 솔바람이 다 날려버렸다. 그러나 겨울이면 찬바람을 안고 십리 길을 걸었다. 추위를 이기려고 뛰어가면 찬바람이 칼바람으로 변해 볼을 스칠 때 회초리로 볼을 맞는 피부가 터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을 꺼내 볼을 만지면 손도 꽁꽁 얼어 볼을 만지는 건지 머리를 만지는 건지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학생들도 다 그렇게 고생하며 학교에 다녔다.
7남매 막내였던 나는 언니들이 학교 가니까 그저 따라가고 싶어서 동장인 삼촌을 졸라서 만 6살에 입학하였다. 십리 길이 어린 나에게는 너무 먼 길이었다. 학교 가는데 발이 시리고 손도 시리고 너무 추워서 가다가 울었다. 내가 울면 그 당시 나보다 11살 많은 5번째 언니가 면소재지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나를 업고 학교로 갔다. 날마다 전쟁 같은 초등학교 1. 2학년을 나는 그렇게 보냈다. 상급생이 된 후 하교 길, 문방구에서 들러 친구들과 사탕도 사 먹고 쥐포 한 장씩 사서 뜯어 먹으며 십리 길을 귀가했다.
사곡면소재지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사십 리 밖에 있는 읍내로 가야만 했다. 학교 다니려면 우리 마을 학생들은 모두 읍내에서 자취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이면 집으로 와 부모님 일도 거들고 용돈도 받고 쌀과 반찬을 가지고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나의 자취방은 나란히 세 개중에 가장 왼쪽 골목길 방이었다. 지나가던 짓궂은 남학생들이 방문을 수시로 두들겼다.
중간 방은 누나와 내 또래 남학생 그 옆방은 여고생 둘이, 저녁 시간이면 모두들 방문 앞의 연탄불 아궁이에 냄비를 올려놓고 밥한다고 분주했다. 나도 나보다 6번째인 언니와 함께 자취하는 2년 동안은 그래도 밥을 먹고 학교 다녔다. 언니가 졸업하고 내가 고 3이 되자 혼자 자취를 하게 되었다. 나는 밥해 먹는 게 왜 그렇게 귀찮은지 라면이나 빵,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아니면 또 쥐포를 사다가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쥐포는 오징어와 달리 조금 떼어서 꼭꼭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포만감까지 안겨주었다.
그 시절 나에게 가끔 쥐포를 사다주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내 옆방에 사는 남학생 친구였다. 그도 고향집이 나처럼 산골이었는지 자신의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다. 그는 성격이 깔끔하여 교복이 늘 단정했고 부지런하여 밥도 방청소도 나보다 더 깔끔하게 잘했다. 내 생일날이었다. 그가 불러서 자취방으로 갔더니 나에게 잠깐만 기다려라 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서 밥상을 차려 왔다. 친구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상을 내밀면서
“ 니가 밥을 잘 안 해 먹는 것 같아서....... 빨리 먹어라.”
“ 너도 같이 먹자”
“ 난 아까 먹었다.”
동그란 밥상에는 밥 한공기와 계란프라이, 구운 김 몇 장, 시금치와 미역국 그리고 진한 우정과 사랑도 담겨 있었다. 남학생에게 여학생이 밥상을 대접받는 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고 한편으로 그의 마음이 밥공기 속의 밥알처럼 따뜻하게 전해져왔다. 그 후에도 그는 나에게 밥상을 자주 차려 주었지만 나는 라면 한번밖에 끓여주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살면서 생각해보니 그가 나의 첫사랑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내게 올 때 항상 뭔가를 들고 왔다. 아이스크림, 찹쌀 도넛, 그리고 쥐포를 자주 사 왔다. 우리는 쥐포를 연탄불에 구워 먹었다. 세월의 갈피마다 숨겨져 있는, 특히 눈이 오던 날 연탄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쥐포 구워 먹던 추억과 그 맛, 사람이 촉각 가운데 혀가 가지는 미각은 아주 오래 기억되기 때문에 어머니나 고향의 음식 맛을 그토록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쥐포의 단맛은 잊을 수가 없다. 이런 게 바로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작지만 단단한 추억의 힘이라 생각한다.
투명하던 쥐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작은 쥐포 한 장으로 하루가 행복하다. 쥐포를 뒤집으면서 아~ 세월도, 인생도 이렇게 뒤집을 수 있어 그때 그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시 다닐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냉동실에 들어 있는 쥐포 사십 장을 하루에 한 장씩 구워 먹는다면, 나는 사십일 동안 입맛으로 첫사랑을 느끼며 가슴으로 감동하고 손으로 사랑의 이야기를 적겠지. 그렇다면 날마다 먹지 말고 아꼈다고 그리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한 장씩 꺼내 구워먹어야겠다. 가능하다면 80년도 초반의 듣던 노래도 들으면서 쥐포를 꼭꼭 씹어 먹어야지 맛있다고 허겁지겁 먹다가 그리움에 체할 수도 있으니까. 나에게 첫사랑의 추억을 가져다 준 신호균PD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의성문학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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