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달
인도네시아는 우기가 끝나가는
요즘 뎅기열이 유행하는 철이다.
시골로 출장 갔던 큰딸이가 모기에 물려서 뎅기열로 열흘간 입원해 사경을 헤맸다. 초기에 입원시켜서 동생에게 간호하라고 했더니 밤중에 전화 와서
“ 엄마 언니야가 열나면 자꾸 엄마 찾고 ‘이 길이다.
저 길이다’ 하며 헛소리한다.”
그 소리 듣고 덜컥 겁이났다. 뎅기열로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다음 날 비행기타고 자카르타로 갔다.
뎅기열을 인도네시아 어로는 드맘 버르다라(Demam Berdarah dengue)라고 한다. 피부 속에서 피를 흘린다는 뜻인데 피부에 상처가 있으면 출혈이 응고되지 않아 상당히 위험하다. 증상은 두통과 고열이 심하며 술 마신 사람처럼 온 몸이 벌겋고 달아올라 뜨겁고 홍역처럼 붉은 점들이 전신에 돋아나며 가려움이 심해진다. 가루약을 발라줘야하며 견딜 수 있으며 뼈가 쑤시는 고통을 동반한다. 게다가 목이 아프고 속이 메스껍고 토하려고 해서 음식 먹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렇게 열흘 아팠다가 회복하고 큰딸이 출근했다.
아파트를 청소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려 받아보니 큰딸이다.
“ 여보세요 ”
“ 엄마! 큰일 났다.”
전화를 받자마자 거두절미하고 ‘큰일 났다’는 그 한 마디에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심장은 절구통으로 가슴은 벌렁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벌렁거리는가슴을 쓸어내리면서
“ 와?..... 무슨 일이고?”
나는 점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 000님이 인터넷의 글을 클릭했는데 엄마 블로그였데”
“ 인터넷 속의 가만히 있는 엄마 블로그가 왜? 누구 비판해 놓은 글도 없는데.......”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 오히려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열이 날 때 가루약을 발라줘야 함/ 아들도 2년 전에 뎅기열 앓았는데 그때 모습
그리고 두 시간 후, .
바쁜 양반들 몇 분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식사 대접하겠다는데 때마침 있는 시간 없다고 거짓말 할 필요가 없었기에 예약된 식당으로 먼저와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서로 인사 나누고 깡마른 체격의 안경 쓴 남자의 대화첫마디가
“ 어~ 사투리 쓰시네요.”
“ 네”
“ 저는 늘 글로만 읽어서 사투리 안 쓰시는 줄 알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생각(?)했던 내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고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독자로만 남겨 둘 걸 그러면 투박한 말씨의 경상도 억양의 여인이라는 걸 굳이 까발리지 않았어도 됐을 터인데.........
혼자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 상대방이 던진 대화에 너무 공백을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나는 웃으며 한 마디 했다.
“ 네 근본이 경상도인 걸 속일 수가 없잖습니까,”
“ 맞습니다.”
나에게 사투리 한다던 그분도 경상도 출신이었다.
우리는 함께 웃으면서 금세 사투리 경연대회처럼 사투리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동류 의식을 느낄 때 상대와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 고향, 취미, 나이.......
그분과 나는 같은 또래였다. 굳이 남자 여자 따지지 않고 그냥 마주보고 있기만 해도 좋고 편한 친구다.
또래는 자랐던 도시와 입었던 교복은 달라도 그 시절 유행하던 노래를 함께 기억하기 때문에 그 노래 한곡만으로도 끄집어 낼 수 있는 진솔한 추억들이 너무 많다.
체육복 입고 담배 사러 가던 아저씨와 슬리퍼 신고 두부 사러 가던 아줌마가 구멍가게에서 만나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그런 편한 만남이 또래들끼리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분은 내 글을 한인뉴스 책자로만 몇 년째 읽었다가 다음 화면에 뜬 글을 우연히 클릭하였는데 내 블로그를 접속이 된 것이었다. 영원히 수수께끼처럼 숨겨져야 할 내 블로그가 들통이 나버렸다. 그 블로그 덕분에 나는 아구찜을 대접 받았다. 늘 올챙이 같은 인도네시아 콩나물만 보다가 자카르타의 횟집에서 만들어진 늘씬한 한국콩나물로 버물려진 아구찜을 보니 먹기도 전에 입안에는 군침이 가득하게 고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을 바라보니 오지의 여행을 상당히 좋아하셨다. 담벼락에 시들어가는 호박잎을 보면 물을 부어 주고 싶은 그런 농심도 지녔고, 힘겨운 남의 삶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떼어 주는 그런 분이었다.
식사와 담소가 마친 후 테이블 의자를 밀고 일어서면서
“ 오늘 이 자리는 김성월작가의 팬으로서 대접하는 것이며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의미심장했다.
그날 밤 딸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은 의미심장이 아니라 으미~ 심장했다. " 민아와 나는 엄마는 그저 엄마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내가 아니 우리가 신처럼 떠받드는 그분에게서 엄마가 그렇게 대접받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너무 좋더라."
*점잖게 앉아 있느라고 아구찜을 보고도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ㅋㅋ
이 사진은 짱돌이네 블로그에서 http://blog.daum.net/sun-pkj-noon/17943096
'인도네시아 일상 > 인니 한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네시아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다 (0) | 2011.03.10 |
---|---|
어젯밤 내 눈에 눈물 흘리게 한 어떤 남자 (0) | 2011.03.07 |
방송 촬영하려다가 내 머리 CT촬영하던 날 (0) | 2011.01.10 |
구구절절 (0) | 2010.11.26 |
중년신사와 도토리묵 한 그릇 (0) | 2010.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