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황광산 까와 이젠/Belerang Kawah Ijen
바뉴왕이 유황광산에 가 보면
별과달
오른쪽 유황 떨어진 모습 왼쪽은 땅바닥에 굳어진 유황 ↓
인도네시아 섬 전체에는 활화산이 약 300여개가 있지만 까와 이젠과 똑같은 곳은 없다고 한다. 오늘은 그런 멋있는 까와 이젠(Kawah Ijen)으로 가는 날이다.
어제 분명히 이슬람사원이 저 멀리 있었는데 새벽기도소리가 하도 커서 호텔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4시에 깼다.
바뉴왕이(Banyuwangi)는 시골이라 공기가 맑아 소리도 잘 퍼져나가는가 보다. 말랑에 사는 사람이 바뉴왕이가 시골이라고 말한다면 자카르타에 사는 분들‘ 오십보백보’라고 하시겠지. 아침 먹을 시간이 없어 어제 아침식사용으로 부탁한 샌드위치를 받아 호텔을 나섰다.
산으로 올라가다가 노란색 큰 트럭을 만났다. 트럭은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있었다. 간밤에 비가 왔다. 우기가 끝나가는 시점이라 비가 병아리 눈물만큼 왔는데도 오르막이라 길이 미끄러운지 트럭 바퀴들은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검은 연기도 꾸역꾸역 났다. 트럭에 탄 사람들은 유황을 짊어져 나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한참 올라갔다. 주차장이 나왔다. 모든 차들은 주차 시켜 놓고 걸어서 올라가라고 했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산으로 인부들과 함께 올라갔다. 그들이 메고 가던 빈 광주리를 달라고 해서 어깨에 메어 보았다. 빈 광주리에 점심용으로 빵 몇 개 들었을 뿐인데 5kg나 된다고 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내 생각으로 한참을 갔다고 느껴졌다.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팠다. 사람들이 유황을 메고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빈 몸으로도 올라가는 것도 힘이 든데 유황을 멘 사람들은 내리막길을 평지처럼 걸었다. 정말 그들 앞에서 낑낑대면서 올라가는 것이 미안했다. 또 한참을 올라갔다. 중간쯤에서 짐을 지고 내려오다 쉴 참으로 빵 먹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물었다. 청년은 길섶에 푯말을 가리키며 숫자가 32Hm가 되면 분화구라고 했다. 그 청년이 지적한 푯말의 숫자는 17Hm이었다.
산 중턱에 간이 휴게소가 있었다. 그곳은 인부들이 유황을 분화구에서 지고 와 무게를 다는 곳이었다. 한 책임자가 있었고 무게를 잰 영수증과 유황을 지고 정제하는 곳까지 가서 돈을 받는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음료와 간식거리도 판매하고 있었다. 인부들이 숙소로 활용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 브로모화산의 분화구 모습
내가 선 곳이 제일 높은 곳 같았다. 고개를 휙, 돌리니 반갑다는 푯말이 분화구에 꽂혀 있었다. 는 해발 2380m(32Hm) 푯말 옆 분화구를 디디고 섰다. 까와 이젠 분화구 넓이는 5.466Hr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동화책 한 페이지를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놓은 듯했다.
까와 이젠을 브로모와 나름대로 비교해보았다. 브로모는 지프타고 신나게 말 타고 모래사막을 달려 계단을 올라갔다. 누구나 가기가 쉽다. 그래서 나도 십년 동안 열다섯 번이나 가봤다. 브로모가 잿빛 양푼이 속에서 뽀얀 가스를 피워 올린다면, 까와 이젠은 잿빛 세숫대야 안에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연 청잣빛 물을 담고 있다. 물 옆에는 노랑 연기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까와 이젠은 약 2km 거리를 등산해야하고 분화구 위에서 유황 캐는 곳까지는 구불텅하고 경사진 돌길을 약 800m 더 걸어야 한다. 그들이 말하길, 뱀길(jalan ular)이라고 했다. 길이 너무 가팔라서 내려가는데 나는 식겁했다.
광산의 인부들은 약 380여명이나 된다. 나르는 사람 캐는 사람으로 나눠지고 유황 캐는 사람은 고작 열 명으로 2교대였다. 그들은 유황이 흘러내리도록 배관 설치작업도 하고 배관이 너무 뜨거워지면 화재가 날 수 있다며 4시간마다 물을 뿌려서 배관을 식혀주기도 했다. 유황이 흘러내리는 하루양은 배관 당 약 300kg이라고 했다. 뜨거운 액체로 떨어질 때는 오렌지색인데 식고 굳으면서 노랑
으로 변했다.
가스가 자욱했다. 유황이 줄줄 흐르는 현장은 마치 독감이 유행하는 병원과도 같았다. 인부들의 기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가파른 길을 내려와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방독마스크를 사용해도 나는 콧물과 눈물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그곳의 인부가 말하길 내 몸이 약해서 그렇다고 했다.
유황이 흘러내리는 배관은 약 70개 정도이며 배관 설치만 16년째 해온 미스따리씨를 만났다. 그는 회사에서 자신의 건강상태 염려하여 종합검진을 받아 보라고 권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혹시나 못 고칠 큰 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것이 더 좋다면서 기침을 계속해댔다.
† 촟농처럼 떨어지는 유황을 만져보는 사람
분화구 물의 부피가 2억m3에 달하며 물의 온도가 가장 낮을 때는 50도 정도이나 높이 올라가면 섭씨 200도까지 된다고 한다. 나는 호수 가까이로 갔다. 물은 우아하면서도 잔잔했다. 미스따리씨에게 손을 넣어 봐도 되는지 물어 보고 잠시 손을 넣었다. 뜨거웠고 금방 빨갛게 달아올랐고 따끔거렸다.
↑ 유황을 광주리에 담아 나르려는 인부들 그들은 마스크도 없이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물은 알레르기 피부에 좋다고 했다. 분화구의 물 색깔이 변하는 시기는 일 년 중 1-2월 중에 검붉은 색이나 초록색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그 시기는 일주일에서 보름이 걸리며 그때는 독이 분출하기 때문에 인부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의 색깔이 변하려는 징조를 volcanology seismografik 보다 자신의 경험으로 먼저 알 수 있다고 미스따리씨는 말했다. 하긴, 옛날 우리 조상들이 언제 라디오로 일기예보 듣고 봇물이나 콩 타작 했던가, 날씨와 경험으로 하셨지.
↑ 유황 정제 현장에서 두 번째 천으로 걸러내는 과정
인부들이 나른 유황은 깨끗하게 정제되었다. 고운 천으로 두 번이나 걸려내는 작업을 했다. 감주보다 더 곱게 걸려냈다. 뜨거운 유황액체를 타일 바닥에 붓고 얇은 두께로 만들어 자루 속에 넣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유황을 훈증·표백에 사용하였고 그 후 의약 또는 흑색 화약으로 널리 쓰여 왔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유황은 여러 가지로 사용이 되겠지만 설탕미백작용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유황을 오리에게 먹인다고 한다. 유황을 먹인 오리를 팔 개월 가량 키워 한약과 함께 달여 먹으면 암의 진행을 늦춰주기도 하고 진통을 없애주기도 한다고 했다.
↑ 인부들이 멘 유황의 무게는 보통 60- 90kg 정도였고 최고 많이는 100kg까지도 메고 다녔다.
인도네시아 한인뉴스 2009년 7월호 <별과달이 비추는 오지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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