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 있는 새벽에 최원현
밤새 배앓이로 고생을 했다. 잠을 청하여도 좀처럼 잠들 수 없는 불편함이 끈덕지게 온 밤을 따라붙더니 새벽이 되어도 놓아줄 줄을 모른다. 다행히 오늘은 공휴일, 황금의 연휴로 이어지는 날이니 많은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겠지만 내게도 참으로 오랜만에 얻게 된 작은 행복 하나, 바로 느긋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토요일을 다음 날까지 연계해서 여유롭게 휴식의 시간으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경우엔 오히려 주일을 위하여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려 노력하는 편이니 금요일이 연휴로 이어지는 오늘 같은 날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황금 같은 기회를 배앓이로 밤새 고생을 하고 보니 속이 상할밖에. 헌데 그런 와중에서도 낮 내내 그토록 요란스럽던 서울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에 나만 홀로 깨어있다는 사실에 까닭 모를 설레임이 일어남은 왜일까? 어찌 보면 깨어 있다는 말보다 더 신선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깨어있다는 말보다 더 살아있음을 분명하고 절실하게 나타내는 말이 어디 있을까. 깨어 있다는 것은 결코 멀거니 눈만 뜨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함께 온전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깨어있음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일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게 주어지고, 내가 해야 할 내 일들을 할 수 있다는데 대한 감사이며 또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이미 내가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나와 같이 있지 못하고 내가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으로 먼저 떠나가고 말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와 함께 살아있음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이 땅에서 살아있다는 것 보다 더 큰 축복이 또 무엇 있겠는가.
요 며칠 새에 두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갔다. 하나는 죽마고우인데 얼마 전 ㅈ병원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가 며칠 후 퇴원을 해서 엊그제 통화를 했는데 몸이 너무 무거워져 움직임이 많이 둔해졌노라고 하여 함께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그 말의 여운조차 채 가시기 전인 다음날 ㅈ병원 영안실이라며 연락이 온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이 이처럼 종이 한 장의 거리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실감이 안 나는 것도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예감조차 하지 못한 채 맞게 되는 불청객이어서 일까. 그를 떠나보내고 참 마음이 착잡했다. 고3인 딸과 중3인 아들, 그리고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어떻게 차마 눈을 감을 수 있었겠으며 어찌 편한 마음으로 떠날 수나 있었으랴. 그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사랑하는 피붙이들과 그토록 그를 아껴주던 이들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영과 육의 갈림으로 죽음에 임하는 마음보다 더 두렵고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니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지난번 학회의 설악산 학술대회에서 같은 조원이었고, 회원 친교의 시간 때는 너무나도 예쁘게 춤을 추어 기억에 남던 ㅇ병원 주임간호사가 심장 마비로 사망을 하였다는 것이다. 원인이야 더 물을 수도 없었지만 갓 서른의 나이로 죽음 같은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 것 같던 젊은 사람이 한 순간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나처럼 깨어있는 것이라는 너무나도 단순한 사실 앞에 오히려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사위(四緯)가 고요하다. 창 건너 아파트촌 사이사이의 가로등들조차 졸고 있다. 꼭 나만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자못 흥분이 되기도 한다. 문득 지난 해 제주에서 보았던 성산 일출의 감격이 새삼스럽게 충격처럼 떠오른다.
밝으레한 빛 여울이 어둠의 바다를 둘로 갈라놓았다. 주위가 아주 조금씩 밝아지는가 싶더니 아기 주먹만한 작은 빛 덩이가 꽃 봉처럼 피어오른다. 처음엔 아주 조그맣던 것이 순식간에 덩이가 커지면서 두둥실 솟구쳐 올라 이내 찬란한 빛살 나래를 사방으로 펼치며 웅장한 모습으로 치솟는다.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바람 위에 안전하게 앉은 연처럼 안정된 모습을 찾았을 때에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성산 해돋이는 거룩한 분만, 아름다운 순산이었다. 태몽도 없이 순식간에 낳아버린 순동이었다. 태어나는 순간의 신비로움 앞에서 무엇이던지 소원을 빌기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옆 사람을 분간키조차 어렵던 미명의 새벽은 이미 간 곳 없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순동이의 얼굴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순간의 숨막힐 것 같은 고요와 두근댐은 내 영혼이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순간의 나를 또 하나의 전혀 다른 나로 있게 해버렸다. 떠오른다, 떠오른다 하며 자기 최면을 일으키고, 그렇게 떠올리는 내 능력을 보란 듯, 기특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으로 맞이한 성산의 해돋이는 지치고 약해져 있던 내 삶 속에 새로운 활력으로 다시 나부끼기 시작하는 희망의 깃발일 듯도 싶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막 생겨날 것 같은 기대감, 그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고귀한 동기가 아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 버리려 하고, 지금 내가 내린 결정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고 믿고싶어 하는 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요즘의 공주병, 왕자병처럼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 착각이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 자기를 지지해 주는 기둥이 되어주고 더러는 아름다운 이뤄짐으로 나타나 주기도 하니 사람들은 더더욱 그런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성산 일출의 감격과 이 밤 나의 깨어있음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느껴지는 감격으로 서로 같을 수야 없겠지마는 산다는 것 자체가 사랑하는 것이요, 산다는 것은 깨어있음이니 곧 사랑하는 것은 빛을 밝히는 일이요, 보다 그 빛이 피어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곧 사랑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깨어있는 새벽, 그것은 무한한 설렘과 기대로 일출을 기다리는 마음일 수 있다. 그 찬란한 피어오름, 떠오름을 보며 소원을 비는 마음들은 꼭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기 위안이 될 수 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담은 기대로 삶을 열어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순간이 아니던가. 어느덧 가로등 불빛이 옅어지고 어둠 속에 갇혀있던 건물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침이 밝아 온다는 알림이리라.
새벽은 아침과 이어져 있기에 아침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 아침을 여는 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렇다 깨어있는 새벽은 보다 새 아침을 빨리 맞을 수 있는 구실이 된다. 충분한 수면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유한한 우리의 목숨을 보다 길게 쓰기 위해선 어느 정도 밤을 밝히는 희생도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깨어날 필요가 없는, 아니 깨어나지 못하는 밤은 오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밝아오는 아침에 대한 반가움보다 지나버린 한 밤에 대한 내 남은 생명의 짧아짐이 더 아쉬워 지는 것은 아무래도 해놓은 것 하나 없이 지명(知命)에 이르고 있는 내 나이 탓인 것만 같다. 그래서 새벽이 아침을 연다는 것조차 내겐 두려움이 되는가 보다.♥ essaykorea
-------------------------------------------------------------- ⊙ 최원현(崔元賢)
1951년생. 《한국수필》천료(薦了) 등단.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부회장. 강남문협 수필분과회장 및 《한국수필》편집위원. 《건강과 생명》편집위원이며, 제5회 [허균문학상]. 제1회 [서울문예상]을 수상함.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와 시집《아름다울 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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