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공화국
-정말 살고 싶습니다-
최원현
잇단 생활고 자살은 사회적 타살
완주·해남 등서도 '빚 압박'에 일가족 음독
신문에 보도 되었던 제목들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가족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의 한 인터넷 통신장비회사 판매원이었던 조아무개씨는 선·후배 등에게 빌린 돈과 카드 빚 등 1억원을 갚지 못하자 자신의 집에서 어머니(68세)와 아들(3세)을 목 졸라 살해한 뒤 같은 날 오후 10시50분께 회사에서 퇴근한 부인(30세)까지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는데 체포 당시 그도 흉기로 손목을 자해해 피를 흘린 채 거실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전북 완주 삼례에서 둑길에 카렌스 승용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이아무개(33세)씨와 그의 부인 유아무개(25세)씨가 ‘애들을 놓고 갈 수 없어 데리고 간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일가족 4명이 동반자살을 했다. 같은 날 오후 5시께는 광주시 서구 쌍촌동에서 사글세방에 살던 김아무개(61세)씨가 목을 매 자살했는데 그는 4급 장애인으로 혼자 살면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왔었는데 집 주인(41세)에게 ‘미안하다. 통장에 남은 돈 710만원으로 주검을 처리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는 것이다. 이 날 새벽 1시10분께는 전남 해남의 한 여관에서 최아무개(54세·선박 기관사)씨와 부인 김 아무개(47세)씨가 독극물로 동반 자살을 했다.
이쯤 되면 자살공화국이란 말이 헛말은 아닐 듯싶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 해만의 총 자살 건수만도 13,055건으로 하루 평균 36명, 1시간에 1.5명꼴로 스스로 목숨들을 버렸다는 통계이다.
왜들 이처럼 죽음을 택할까? 어쩌면 참으로 무식한 질문이 될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죽을 생각을 다 했겠나?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죽음을 택했겠는가?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그 용기로 살순 없었나? 하면 거기에도 할 말이 없다.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무슨 말인들 못 하랴.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자기 목숨 뿐 아니라 아내나 자식까지도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는 엄청난 무지가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나싶다.
어찌 생각하면 ‘자살’이야말로 ‘살고 싶다’는 가장 절절한 목매임이요, 처절할 만큼 슬픈 몸부림일 수 있다. 정말 나는 살고 싶다고 그토록 마지막 절규를 하는데도 아무도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고 들은 체도 본 체도 안 했을지 모른다. 자기 위주만의 삶으로 일반화 되어버린 요즘에선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이란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그러니 아무리 힘들고 견디기 어렵더라도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의 권한에 대한 월권이요 만용이 아닐 수 없으며,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라 가장 자신을 비겁하게 만드는 행위이며, 창조주에 대한 있을 수 없는 도전이요 항명이요 거역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연령대가 어른 아이 할 것 없다는 데서는 또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를 나이에 죽음의 길로 들어가 버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무어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50년 이상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죽을 생각을 해봤었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삶은 항상 사탕처럼 단 것도 아니고, 신나는 놀이처럼 재미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것처럼 누구나 어려운 때를 극복하면서 성장하고 그걸 통해서 보람과 삶의 의미를 찾기도 했다. 세상일이란 늘 어렵고 힘들 게 마련이고 그걸 해결해 내는 것이 바로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제대로 안다면 ‘죽고 싶다’는 말을 감히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자살은 그래서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 될 수 없으며 정당화 될 수 없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나도 살아보겠다.’는, ‘나도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요 시위였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문제, 자신의 책임을 오히려 남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만 정당화 하려는 이기주의적 사고(思考)일 뿐이다.
1983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토마스 크레이븐이라는 13세 소년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소년은 아주 모범생이어서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일기를 보니 ‘우리 가정은 악마의 저주를 받아 가족들이 일찍 죽는다고 한다. 죽음이 두렵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어머니 곁에서 죽는 게 낫다.’ 소년은 이 가정에 적개심을 품은 한 노인의 헛소문에 자살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자살 현상은 그런 헛소문의 희생도 아니다.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는 의지가 약한 게 더 많은 것 같다. 공부가 너무 너무 하기 싫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라고 한다. 내 현실에선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류의 사고들이 가장 쉬운 것은 생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 같다.
풀꽃 한 송이도 제가 나고 싶어 나고 ,피고 싶어 핀 것이 아니건만 사람의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생(生)’ 곧 ‘살라’와 ‘명(命)’ 곧 ‘명령’이니 ‘살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분명 섭리에 의해 태어나 진 것이다.
이규태의 <눈물의 한국학>을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Y자형의 고무 새총으로 참새를 노릴 때 한쪽 눈을 감고 조준을 한다. 그 조준 반경 속에 다른 참새가 들어와 있으면 새를 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역시 상식화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참새는 노렸던 참새의 어미나 새끼이거나 각시 참새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휴머니즘은 사람뿐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베풀어졌고, 심지어 콩나물을 다듬을 때 목을 자르는 것까지 금하게 할 만큼 생명을 중시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린 그런 생명의 존엄도 휴머니즘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특정한 개인·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집단적이고 전 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 개인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라 부모, 배우자, 자녀들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집단적 경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생활 빈곤 계층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계층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리고 나의 부모, 형제, 친지, 이웃을 죽음의 길로 내몰아 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사회 구조적 문제(모순)로 말미암아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가난에 한을 품고 무섭게 일했다. 야심 찬 사업가로 변신한 그의 인생철학은 `나를 위해, 돈을 위해'였다. 청년은 미국석유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적인 대부호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심하게 착취했다. 사람들은 존경심이 아닌 돈 때문에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의 나이 쉰 셋.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의사도 1년 후 그가 죽을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 그때 신앙의 눈을 뜬 대부호는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로 인생관을 바꾸었다. 거액을 쾌척해 시카고대학을 설립했다. 리버사이드 교회도 세웠다. 여생을 `교육'과 `선교'와 `사랑 실천'에 쏟았다. 그는 베푸는 삶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다. 그가 바로 98세까지 장수한 록펠러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 자살과 살자는 글자 한 자 차이도 아닌 글자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살자’란 생각이 순간적으로라도 뒤집히면 ‘자살’이 된다. 자살공화국이란 불명예스런 표현이 살자공화국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이 땅에 그 어떤 특명을 받고 특명전권대사로 태어난 내 목숨껏 의미 있는 일, 곧 내 사명을 찾아 이루어내는 것이다.
어려운 일,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면 사람은 두 가지의 반응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죽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살려고 한다.
2001년 1월 26일, 인도에는 강도 7.9의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10만 명, 부상자가 20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날 아침 신문에서 넘어진 건물더미를 가리키는 어머니의 울부짖는 사진을 보았다. 지진 피해 현장에서 붕괴된 아파트 건물 잔해 속에 무려 100시간이상 갇혀 있던 25세 어머니와 한 살짜리 아들을 구출해 냈다. 산모는 구조되자마자 건강한 아들까지 출산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자기 목숨을 죽이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소식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산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으랴. 살아있음 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으랴. 내가 죽고 싶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간절하고 절실하게 살고 싶다는 울부짖음인 것을 부끄러이 생각 말자.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 내 이웃의 것이고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 ‘자살’은 ‘살자’가 잠시 뒤바뀐 것이다. 이제 생명의 나라로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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