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퇴보 [현대수필]
최원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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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다. 작품을 쓸 때는 당연히 원고지나 노트에 펜으로 썼었는데 컴퓨터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시작부터 주춤거리며 고민을 하게 된다. 컴퓨터가 없을 때는 의당 원고지와 씨름하는 것으로 족했고, 쓰다가 맘에 안 들면 고통의 흔적처럼 원고지를 꾸겨버리는 멋스러운 특권(?) 또한 누릴 수도 있었는데 컴퓨터를 사용케 되면서부터는 그럴 필요까지 없어져 버린 것이다. 키보드를 통해 입력된 문장들은 내가 없애고 싶으면 얼마든 어느 때든 없었던 것처럼 지워 버릴 수 있고, 수정하는 것도 일부이건 전부이건 큰 어려움이나 불편함 없이 원하는 대로 가능한 것이다. 편리해졌다면 정말 너무 많이 편리해 진 셈이다. 헌데 그 편리성을 놓고 요즘 들어선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고민이 되니 어떡하랴. 원고지에 글을 쓸 때는 한 자, 한 자, 글자와 낱말과 문장이 꿈틀꿈틀 살아 있었다. 생각을 원고지 칸에 옮겨 나가는 동안에도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낱말이나 문장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 주곤 했다. 뿐인가, 원고지가 쌓여 가는 것은 풍성한 가을걷이 마냥 흐뭇하고 충만한 기쁨이었다. 그런데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난 문장들은 그렇지가 않다. 마치 수퍼마켓의 진열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무수한 글자의 집단 속에서 주섬주섬 필요한 것들만 뽑아다 내 방식으로 짜집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마치 남의 것 빌려다 쓰는 것 같기도 해서 전혀 신선한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고, 그만큼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도 아주 많이 바뀌어 버리지 않았는가. 오히려 옛 것을 그리워한다거나 추억하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는 생각까지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변화를 그대로 수용만 하기에는 뭔가 개운치 못한 안타까움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언젠가 작가들의 육필전시회가 열렸을 때도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었지만 돌아가신 문인들이나 선배 문인들의 육필원고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마치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전혀 생각잖은 곳에서 찾았을 때와도 같은 기쁨이랄까? 예로부터 필체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필체에 신경을 많이 썼고 기업체 같은데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도 이력서 하나만 보면 그 사람을 대략 파악할 수 있기에 친필을 요구했었다. 허나 요즘에는 사람의 성격이나 됨됨이보다도 다른 쪽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서류 제출의 방식이나 제출 서류의 종류까지도 아주 바뀌어 버린 것 같다. 이렇게 되다보면 얼마 안 가서 직접 기록하는 일들이란 아예 없어지고 마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 진다. 하지만 나도 요즘은 거의 모든 원고를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초고만은 필히 종이에 펜으로 쓰는 것이 원칙처럼 되어있긴 하지만 그 초고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것을 출력하여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컴퓨터로 하고 있으니 컴퓨터 의존도가 더 높다고 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그렇게 편리하게 활용은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늘 무엇엔가에 미안하고 편치 않은 마음이 남아 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까지 컴퓨터라는 기계 속에 넣어 내 능력 이상의 과장품으로 찍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내용물도 보지 못한 채 포장된 선물을 사다 선물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곤 한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참 시대에 적응치도 못하는 뒤떨어진 사람이 아닌가하여 움찔해 진다. 현대처럼 복잡한 시대에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갈 자격도 능력도 없다는 말일텐데 그렇다면 분명 나는 이 시대에서 삶을 영유하는데는 결국 적합치 못한 사람이 아닌가 라고 생각되어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건 다 몰라도 문학에서만은 그렇지 않다고 우기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인 걸 어떡하랴. 나는 요즘도 편지 받는 것을 참 좋아한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보낸 이의 마음과 정성 그리고 그의 체온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편지 한 통을 쓴다는 것은 여간 거추장스런 일이 아니다. 편지지를 챙겨야 하고, 봉투를 챙겨야 하고, 그 사람의 주소와 우편번호를 적어야 하고 우표를 사서 부쳐야 하는 몇 단계의 번거로운 수고로움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다 아무 종이에나 마구 쓰는 게 아니라 받을 사람에 따라 편지지도 선택해서 사용해야 하며 내용도 일회성으로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 만큼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번거로움이 있는데 누가 그렇게 선호하겠으며 또 너무도 손쉬운 전화라는 문명의 최첨단 기기가 있는데 무엇 하러 그토록 복잡한 쪽을 택하려 하겠는가. 하지만 전화를 받았을 때와 편지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받아본 사람이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것이다. 사실 편리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며, 빠르고 손쉽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내가 편지를 선호하고 컴퓨터로 원고를 쓰는 것에 대하여 아쉬움과 미안함을 갖는 것도 꼭 시대에 뒤떨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변명하고픈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이 입는 옷이나 부르는 노래들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 그네들이 좋아하는 노래도 들으며 배워 보려고도 하지만 좀체로 리듬도 노랫말도 가슴에 와 닿질 않으니 어쩌나. 그러나 언젠가 저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부모들의 어릴 적으로 회귀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의 감성만은 어떤 경우에도 지극히 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해석에서다. 아무리 만들어진 꽃이 아름답다 해도 생화의 향기를 따라갈 수 없듯 기계문명이 제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감성이 기계의 몫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옛 것을 그리워하고, 지나버린 일을 추억하는 일이 어찌 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만이랴. 편리하다고 하여 옛 것을 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건져 올리는 작업은 결코 값없는 퇴보가 아니라 훨씬 귀하고 아름다운 행위일 것 같다. 정성이란 한 땀 한 땀 손놀림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들 아니던가. 빠르고 편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비록 힘들고 늦더라도 따사로운 사람의 정이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원고지에만 정성스레 작품활동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여러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편리하다는 유혹에 자꾸만 넘어가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조금은 손해보는 것 같아도, 조금은 더 힘들어도 한 걸음씩 뒤쳐지는 기쁨이 때로는 무시할 수 없는 행복이 되지 않을까싶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직도 원고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기계적인 글씨보다는 사람내가 물씬 풍기는 글씨 편지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꼭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쉽고, 편리하고, 매끄럽고, 호화로운 것이 다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는 생각, 어쩌면 그런 뒤떨어진 나의 생각들이 밉지 않은 아름다운 퇴보가 아닐까싶기도 하다. <세기문학 2000.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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