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조약 체결
육개장조약 체결
별과달
지난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오후 나는 수라바야공항으로 갔다.
국제공항 출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낯선 세 남자와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네 사람은 우선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저녁 식사하러 한국식당으로 갔다.
만찬식탁에서 육개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나는 말했다.
“지금 육개장 한 그릇을 드시면 18일 동안 우리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
스케줄 잡은 사람이 바로 나였기에 앞으로 인도네시아에 발생할 일을 대충 예견하면서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다는 둥.
그날 밤 백수식당에서 우리 네 사람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마치 경인년 육개장조약체결 같은 얄궂은 것이었지만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고동락을 약속했다.
그런 후 식당을 나왔고 크림 빛으로 녹아내리는 가로등을 머리에 이고
인도네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오지의 섬, 플로레스로 가기 위해
꾸빵(kupang)으로 가는 밤비행기를 먼저 탔다.
플로레스 섬의 원래 이름은 리오(Rio)어로 누사 니빠(Nusa Nipa)였다.
뱀처럼 생긴 플로레스 섬의 모양을 말한 것인데 누사는‘섬’ 니빠는‘뱀’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꽃이라는 포르투갈어 플로레스(Flores)로 바뀌었다.
우리는 꾸빵에 도착했다.
꾸빵에는 사산두라는 악기가 있었고 소금을 헛간 같은 곳에서 정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통티모르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흙속에 녹아 거무스름한 눈덩이 같은 소금을
물에 녹여 드럼통에 담아서 그 물을 끓이니 하얀 소금이 탄생했다.
그 다음날 경비행기를 타고 룸바타섬(P.Lumbata)의 라마레라에서부터 촬영하기 시작하여
서쪽 끄트머리 라부한바조(Labuhan Bajo)까지 배타고 차타고 걸어서 그렇게 우리는 18일 동안 플로레스 섬 전체를
부글부글 끓는 국솥을 국자로 휘젓듯이 휘젓고 다녔다.
라마레라!
4년 전에 그곳을 나오면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돈밖에 모르고 며칠 동안 묵어도 너무 불편한 이곳,
간헐적으로 나오는 수도물을 목욕 물로 받아 둔 통바닥에는 작은 지렁이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녔다.
차라리 바닷물이 훨씬 깨끗하건만 그래도 씻어야하지 않는가,
또 있다.
통신이 두절되고 햇볕이 너무 강렬해 선크림 발라도 땀으로 얼룩져 버린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곳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 그러나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와 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 라마레라에는 왜 갔니?
고래 잡으러 갔었다. 그러나 고래는 못 잡았지만 돌고래는 잡았다.
라마레라에서 라랑뚜가(Larangtuka)로 오던 중 바닷로 지나가는데 폭풍우가 너무 심하여 나는 잠시 죽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봤다. 나 뿐만 아니라 동행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리고 마우메레(Maumere) 또 다시 엔데(Ende) 삼색호수 끌리무뚜에도 가 봤다.
자동차로 바자와(Bajawa)에 갔다.
그곳의 뜨거운 자연분수에도 화산이 폭발한 곳에 또 폭발해서 노란색물이 고인호수에도.
거대한 집들이로 물소 6마리와 돼지 30마리 잡아 잔치 베푸는 베나(Bena) 마을에도 갔었다.
또 다시 자동차로 엄청난 시간을 달려서 루땡(Ruteng)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거미줄 모양으로 논을 만들어 둔 루땡과 호모플로레시안들이 살았다는 동굴과 그이 후손들도 만나고 왔다.
마지막 코스로 라부한바조(Labuhan Bajo)의 수정동굴이라는 바뚜쩌르민에 갔었는데 동굴에 수정은 없었고
돌만 있었다. 수정은 본인의 마음속에 있다는 말 같지도 않는 말을 나는 진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동굴에서 있었던 황당한 사건들로 이참에 혼탁해진 내 마음을 맑게 해봐야겠다고 나름대로 다짐도 했다.
멀고 험난한 촬영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백수식당으로 와서 송별회식으로 또 육개장을 먹었다.
백수식당의 백미는 육개장이었고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속이 니글거렸으니까,
내 평생 육개장 한 그릇 앞에 두고 감사의 기도를 그렇게 거룩하게 드린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이름하여 ‘육개장조약 체결’은 막을 내렸다.
그날 우리는 세계테마기행 촬영으로 인해 너무 고생한 걸 서로 잊지 못하겠다고 하다가
추억을 기념하자며 20년 후에 2030년 2월 3일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오랜 나날동안 함께 촬영한 제작팀들이다.
카메라감독 전정우
장재준피PD
소설가 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