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김 2008. 5. 2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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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나

 


최원현/수필문학가.칼럼니스트.



살아가면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딴에는 잘 한다고 한 것인데 상대에겐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먼 관계에서도 아니고,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끼리

그렇게 될 때는 더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됩니다.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던 아들아이가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복학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시간을 활용할 구체적 계획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 밥을 그만큼 먹었으면 보다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해 올 것으로 기대했던 나의 생각은

조금 성숙한 면은 보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그의 생활 태도에 상당한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 하루는 야단을 쳤습니다. 물론 그 야단 속엔 순수한 교육적인 면보다는 그런 불만과 기대에 어긋난

실망감이 더 강하게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출근을 해서 컴퓨터를 켜니

녀석으로부터 e 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직접 말하긴 뭐하니 잘못 했다고 메일을 보냈나보다 짐작하고

열어서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녀석의 메일 내용은 다분히 항의요, 조목조목 반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녀석의 이런 항의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선 하나도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메일 내용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러이러한 부분은 아빠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는 것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어느 부모치고 자식에게 잘 해주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녀석은

그것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모상에 대한 저 나름의 기대치였던 것입니다.
헌데 참 막막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50년의 내 삶을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부정해

버리는 녀석의 지적에 그게 틀리다는 반박을 할 수도 없잖은가. 저들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밥이 없어서 굶었다고 하니 그럼 라면을 먹지 그랬느냐고 말한다는 요즘 아이들인데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 준들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이 암담함, 지나온 삶, 어쩔 수 없었던 그 시절을 어떻게

이해시킨단 말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일은 이해시켜야겠다는 마음보다 너무너무 화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딘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서 이해하고 양보하고 막힌 것을 풀어야 할텐데 시도조차 하기가 싫습니다.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날들, 그것들이 어디 나만을 위한 것이었던가. 오히려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살았던 날들이건만 저희들에겐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 그런 삶이었다니 참으로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라고, 두 달쯤 지나니 조금 마음을 풀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도 충격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생각되는 게 우리 삶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얼마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삶은 어쩌면 상대적인 게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하는 일보다 누군가와
무엇이든 관계를

가지며 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결국 '함께 하는 삶'으로 상대의 입장을 생각지 않으면

나의 삶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아들녀석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아빠를 이해할 것입니다.

아니지요. 옛날 같은 세상이 돌아오지 않을 테니 영영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지요.


이해인 시인의 시에 '부끄러운 고백'이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죽으면 아무 쓸모도 없어져 버릴 안구도

장기도 기증을 못한 자신, 죽어서라도 여러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까지 놓아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부끄럽습니다. 더 쉬운 문제, 더 급박한 현실 문제에도 감정만
앞세우고, 아직도 어리다

할 수 있는 아들아이와 감정 겨루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하지만 가족간에도 이런

일은 더 많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아이를 통하여 또 하나의 나, 부끄러운 나를 보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녀석이 내게 요구했던 기대치를 나는 변명하면서 오히려 내 입장에서 아이에 대한 기대치만

고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최원현 수필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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